2024-04-27 22:08 (토)
두 박<朴>의 운명적인 애국 인연과 사후에도 이어진 보은
두 박<朴>의 운명적인 애국 인연과 사후에도 이어진 보은
  • 박광수 논설위원
  • 승인 2023.08.1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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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 현 포스코 >
도전과 길
3편- 박태준 회장과 박 대통령 사이의 인연과 보은

일본 학창시절 `조센징` 차별 맞서 일본 학생 우두머리와 싸워
6ㆍ25 전쟁 때 여러 전투서 공 세워… 육군대학 수석 졸업
육사서 교관 박정희와 만난 후 평생 관계… 박지만에 은혜 갚아
1978년 12월 8일 포항 제철소 3기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박태준(오른쪽) 회장. / 포스코
1978년 12월 8일 포항 제철소 3기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박태준(오른쪽) 회장. / 포스코

현재 세계 1위 철강회사인 포스코(과거 포항제철)건설의 대부로 불리어지는 청암 박태준 회장은 1927년 10월 24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 임랑마을(현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부친인 밀양 박씨 박봉관과 모친 김소순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남 양산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이후 경남 부산부 부산진에서 얼마간 유년기를 지내다가, 부친 박봉관이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당시 선진국인 일본으로 건너가면 일자리도 많고 첨단 문물을 배울 기회가 많을 것으로 판단, 6세였던 박태준 회장을 데리고 일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해 박태준 회장을 일본의 초ㆍ중ㆍ고를 졸업시키고, 일본 명문 대학교 와세다 공대 기계학부로 입학시킨다. 그 당시 박태준 회장은 대한민국 국민 중 0.01%에 해당하는 영재였다. 다만 와세다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일본에서 중ㆍ고등학교 재학 중의 일화를 잠시 소개하면 일본인 동료 학생의 우두머리(유도와 검도의 유단자)가 박태준 회장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리자, 학교 운동장에서 그 학생과 맞장으로 싸움을 벌였고, 체구(부모에게 물려받은 키는 크지 않지만 단단한 체격)를 갖춘 박태준 회장은 피투성이로 맞으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일본 학생대장의 약점인 명치와 턱을 일시에 가격하면서 치명상을 입혔다. 당한 일본 학생은 땅바닥으로 쓰러졌고, `간바레닛뽄(힘내라 일본)`의 목청을 높여 구경하던 일본 학생들은 깜짝 놀라면서 혼비백산해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조센징이라는 민족차별의 단어를 일본 학생들 입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한 일화가 전해진다.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박태준 회장은 1947년 육사 6기로 입학해, 1948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1950년 발생한 6ㆍ25전쟁 당시 경기 포천지역 1연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준 인물이고, 생사를 넘나드는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당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인 화천수력발전소 사수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는 등 군무에서 탁월한 능력도 발휘한다. 이에 따라 육군에서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며 대한민국 육군의 탁월한 인재로 평가되면서 육군 소장까지 진급한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건군에는 반드시 건군이 필요하다"라는 결심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1948년 어느 봄날 청년 박태준은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처음 박정희(당시 탄도학 교관인 박정희 대위)를 만난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5ㆍ16군사정변 직후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보좌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의 인연을 이어 나간다.

사실 5ㆍ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는 박태준을 군사혁명의 핵심 가담자로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가 만약 군사정변 계획이 무산되면 자신의 가족들을 본인 대신 돌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서로는 믿고 의지하는 형제 이상의 관계였다.

후일담이지만 부모(박정희와 육영수)가 총탄으로 서거하자 방탄한 사회생활을 하던 박정희의 장남 박지만은 마약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를 마약범죄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 박태준 회장이며, 향후 사업가(현 EG 회사 회장)로 성장하라면서 기업체 설립(1991년 삼양산업 인수하고 2000년에 코스닥에 상장하며 상호를 EG로 변경)을 돕는다. EG는 전기차와 가전제품의 핵심부품인 고순도 산화철 생산에 특화된 회사로 에너지환경과 플랜트 소재사업을 추진하면서 세계시장에서 산화철분야 1위를 유지 중이다.

달리 표현하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후광과 은혜를 청암은 박정희 서거 후 갈팡질팡 생을 살던 박지만을 올바른 인간으로 키우면서 박정희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리고 16세 연하로 변호사 출신의 부인인 서향희 씨와 인연을 연결시키고 행복한 가정(쌍둥이 4남)을 이루게 만든 인물이 박태준 회장이다.

육군소장으로 지난 1963년 예편한 청암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적자투성이 회사인 대한중석을 단기간 내로 흑자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박정희는 박태준 회장을 포항제철 건설 책임자 사장으로 임명하면서 포항제철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재 포스코의 주력 사업장은 포항시 및 광양시인데, 부지 선정 시의 뒷말을 잠시 열거하면 박정희의 왼팔인 JP(김종필)는 자신의 고향인 충남 서천으로 건의했고, 오른팔 이후락은 울산시로 건의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은 이미 현대그룹의 예정 부지가 있고, 서천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부지로는 적합지 않다고 판단했다.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포항을 결정하며 부지 선정 문제는 일단락된다.

당시 부지로 선정된 포항은 모래벌판으로 돼 있어서 매입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나, 지난 1970년 4월 1일 첫 삽을 뜨면서 착공한 포항제철소는 그야말로 자금과 기술력 부족,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걸었으나 맨땅에 헤딩한다는 속담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불어오는 모래바람의 환경을 이겨내면서 기적에 기적을 써 내려갔고, 드디어 착공 3년 2개월만에 1기 종합준공식을 무난하게 완료하고 매년 100만t씩 생산을 증대시키면서 전 세계 철강업체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포항제철 문화는 이때부터 생성됐고, 그 기본은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만들었다고 필자는 본다.

<기획 연재 -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박광수 경남매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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