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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단군조선 인식 오류
이병도의 단군조선 인식 오류
  • 경남매일
  • 승인 2023.07.0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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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이헌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문정창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수를 지낸 것을 사죄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해방 후 역사를 연구하였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역사학계를 비판하면서 국사바로찾기 운동도 하였다.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주인정신 관점으로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ㆍ<고조선사연구>ㆍ<한국고대사>ㆍ<일본상고사>ㆍ<백제사>ㆍ<가야사> 등 다수의 저작을 했다.

<이병도 저 한국고대사연구평>(백문당, 1976)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의 시작을 단군의 설화로 시작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이 다 같이 "왕검 조선", "개국하니 이름이 조선이다", "처음 조선이라 칭했다" 등과 같이 실존적 국가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는 한국 고대사의 서장을 `단군 설화`로 시작하면서 그 실존을 부인하고 하나의 설화로 격하시켰다. 민족의 기원을 흐리게 하는 이러한 역사 기술은 일제 식민사학자인 이마니시 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4천 년이 넘는 역사인 우리나라에 단군조선을 신화 또는 설화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1910년 국권피탈 전까지 단군사화로 교육하였다. 군국 일본은 경찰을 동원해서 전국의 서점ㆍ향교ㆍ개인의 서재 등을 샅샅이 뒤져 20여 만권을 압수하여 자주적인 사상이 들어있어서 식민사관에 방해가 되는 문헌은 감추거나 없애버렸다.

이마니시 류는 순암 안정복이 사용하였던 <삼국유사>를 압수하여 고조선기 상(上)의 환국(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하여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환인ㆍ웅녀 등이 있으니, 단군조선은 하나의 신화로 역사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면서 그것을 논문으로 하여 경도 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마니시 류가 단군조선을 신화로 돌리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개작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남한지배설`을 연출하려는 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4천 년의 한국역사를 2천 년으로 깎아내려 북은 중국의 한사군이 지배하였고, 남은 왜국에 예속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병도가 단군조선을 취급하는 태도에 또 하나 이마니시 류와 닮은 점이 있다. 그것은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것이 곧 신시(神市)다"라는 구절. 이것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고 시기 한 국가에서 3천 명이라는 병력은 대단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단군조선이 정복 국가였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마니시 류는 침략사관을 만들기 위해 이 기록을 누락하였다. 이병도도 무리 3천 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병도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평양 게머리 나루터에 끌고 오기 위해 여러 설을 늘어놓았다. 우리 고대 사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조선사편수회가 내놓은 조선사 고대편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설화하기 위하여 도리이 류조와 세키노 다다시 등이 만들어 낸 이른바 낙랑유적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중국관계 사료를 모집하되 그들의 식민사관에 거슬리는 것은 일체 수록하지 않았다. 이병도도 이에 따라 왕검성을 험독(險瀆)이라고 중국사서에 나온 것을 무시하였다.

험독에 대하여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다.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세웠으므로 험독이라 불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이 곧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 패수가 대동강이나 청천강이 될 수가 없고 북한 평양이 왕험성이 될수가 없다.

이병도는 전혀 물이 험한 곳이 아닌 평양 게머리 나루터 한 구릉에 있는 토성을 위만의 왕험성이라 하고 지도까지 그려 놓았다. 그러나 한서지리지 요동군조의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세웠으므로 험독이라 불렀다"는 구절을 보았으면 헛되이 지도까지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병도는 1925년 이케우치 히로시의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촉탁으로 조선의 고대사를 담당하고 있던 이마니시 류를 주임으로 모시고 보조했다. 이마니시 류의 학설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촉탁과 수사관보로 근무하였다.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이완용의 집사를 지냈다)의 묘비명에는 수사관을 한 것으로 과장 기록되어 있다.

중국 요나라의 건국시에 전쟁이 있어서 건국 연대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국은 요임금을 역사화하였다. 대만의 역사교과서에는 중국 요나라의 건국 연대가 서기전 2,333년으로 단군조선의 건국년대와 같다.

문정창은 <진서(晋書)> 왕희지전에 `요순북면지도(堯舜北面之道)`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이것은 요순이 누군가에게 조공을 했다는 것이다. 천자는 남면하고 제후는 북면하여 제후가 천자에게 조공하는 것이 중국 고대사회의 예법이라고 한다. 요순은 누구에게 조공을 한 것일까?

위의 글은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난도질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병도ㆍ신석호가 해방 후 친일파로 숙청당하기는커녕 거꾸로 한국의 역사학계를 장악해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정설로 유지시키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이병도ㆍ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라는 책을 참고하여 쓴 것이다. 식민사학 카르텔을 극복하여 단군조선 역사를 바로 정립하여 교육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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