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3:39 (일)
청와대 가는길
청와대 가는길
  • 경남매일
  • 승인 2023.06.20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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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동그라미심리상담센터장
이영조 동그라미심리상담센터장

새벽 5시,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지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일찍 잠에서 깨어난 데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 때문이었다. 7시에 관광버스를 타야 한다는 강박감에 알람까지 세팅했지만 뇌에 입력된 시간이 알람보다 한 시간 먼저 울렸다.

모두 잠든 시간, 나홀로 여행준비, 잔잔한 흥분이 가슴 저편에서 스멀대며 올라온다. 대통령이 근무하는 곳, 생활공간, 지금껏 베일에 쌓여 궁금증을 자아냈던 청와대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은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곳을 오늘에야 이루게 되었으니 작은 설렘이 이는 건 당연했다.

버스는 김해에서 정확히 7시에 출발했다. 도란도란, 크고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차창밖에 펼쳐진 봄의 향연은 막힌 가슴을 뻥 뚫어냈다. "세상에, 여행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식사를 제공해 준데", "정말" 다른 친구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5만 원에 서울 왕복 교통비, 세끼 식사 제공,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낙천적인 친구는 "그냥 지켜보자구" 상황을 즐기려 했고, 성마른 친구는 세상사 공짜가 어딨어, "흙 파서 장사하나"라며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출발 후 한 시간여쯤 후 아침 식사가 제공되었다. 일회용 접시 위에 은박지로 포장된 주먹밥, 수육과 막장, 밑반찬 5가지가 담겨 있었다. 고객을 생각하는 가이드의 정성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신설 여행사가 고객 확보와 여행사 홍보 차원에서 과한 서비스하는 거라고 정답 풀이를 했다. 이유는 뒷전이고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커피를 주문하란다. 완전히 풀 서비스였다. 쟁반에 따끈한 백설기 떡과 커피가 배달되고, 우리는 배부른 정승이나 된 듯 커피를 마시며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잠에 빠져들었다.

고막을 울리는 가이드 멘트에 잠에서 깼다. 오늘의 일정이란다. 청와대 도착은 오후 3시라고 했다. `8시간이나 걸린다고?`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2군데 쇼핑센터에 들르겠다는 것이다. 궁금증은 곧바로 풀렸다. 아무런 소란도 일지 않았다. `과한 호의를 베풀 때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외국 여행을 가도 쇼핑센터에 들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쉽게 수용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반발보다는 상대방 입장을 헤아리고 따르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살면서 터득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번에는 충동구매를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첫 번째 쇼핑센터에 입장했다. 일흔셋의 나이를 밝히는 사장님, 나이를 초월한 건강미 넘치는 모습에 호감이 느껴졌다.

금산의 명물 인삼, 홍삼 찌꺼기를 발효시켜서 사슴에게 먹이므로 녹용의 효과가 뛰어나다, 사슴농장을 직접 운영한다, 중간 유통과정을 없애고 직거래함으로 시중가보다 저렴하다,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구매 욕구 레벨이 한 단계씩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 앉은 친구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단단히 쳐놓은 방호막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성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다.

`육십이 훨씬 넘도록 한 번도 녹용을 먹어본 적이 없어, 이번 기회에, 몸이 나빠지기 전에 건강을 챙겨야지` 건강을 앞세운 합리화가 이성을 압도해 나가고 있었다. 녹용 중의 최상인 분골을 농축하고, 녹용으로 환을 지은 사향 녹용환을 1박스 추가해 주겠다는 사장님의 마지막 멘트에 이성은 패잔병이 되었고, 내 손은 구매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료들도 구매 사인에 동참했다. `몸 아프면, 돈이 무슨 소용이야` 건강을 챙기려는 노인들의 마음을 공략한 쇼핑센터 영업전략에 여행객은 일제히 백기를 들었고 지갑을 열었다.

구매 실적에 만족한 가이드는 소문난 맛집, 황태 해장국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점심식사도 무료 제공이다. 허기진 여행객들은 속풀이 해장국에 반주를 곁들여 속을 든든하게 채웠다. 예정된 시간을 30분 넘겨 청와대에 도착했다. 관람에 주어진 1시간 30분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여행의 기록은 사진이다. 이 사실에 동의한 일행은 청와대를 배경으로 자신이 들어간 사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쇼핑과 청와대 관람,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이번 여행, 저렴한 여행비용의 대가로 경험한 쇼핑센터 방문, 충동구매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내지 못한 나약한 의지력, 그것을 내 건강을 위해 투자한 현명한 행동으로 합리화 시키는 나의 건강한 정신을 좋아한다.

상대를 믿는 긍정성은 약의 효능 이상의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플라시보 효과이며, 약을 처방해 준 의사를 신뢰할 때 나타나는 결과다. 나는 이번 쇼핑에서 구매한 건강식품에 플라시보의 주문을 걸 것이다. 우리 인체는 생각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 긍정의 심리를 만드는 것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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