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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 헤치고 온 파사석탑, 남쪽 왜 침략 막아왔다"
"거친 바다 헤치고 온 파사석탑, 남쪽 왜 침략 막아왔다"
  • 경남매일
  • 승인 2023.06.1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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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전 김해시의원>

`파사돌` 아닌 석탑 기록은 당시 논란 극복 증거
몇 차례 해체 거치면서 중요 정보 훼손 가능성
일연스님, 실물 확인 김해 찾아 "돌 이지역 종류 아냐"
안전한 뱃길 기원 탑 조각 떼어내 요즘 형태 설득력 얻어
김해-인도 교류ㆍ허왕후 도래 증명 유일한 물질 증거 가치 커
하성자 의원
하성자 전 의원

"금관(金冠) 호계사의 파사석탑(波裟石塔)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허황후 황옥이 동한(건무 24년, 서기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삼국유사> 권제3, 제4 `탑상` `금관성 파사석탑조`, 국사편찬위원회).

구지가 발상지이자 김수로왕 탄강지인 구지봉을 거쳐 허왕후 능으로 향하는 오솔길, 위용을 떨치는 소나무들, 우람한 솔 둥치를 수직으로 오르는 청설모 두 마리, 가늘고 높은 가지를 흔들어서 발판 삼아 나무를 옮겨가며 길을 안내하듯 날렵하니 깜찍하다.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지빠귀들은 나뭇잎 사이로 저들끼리 재잘거린다. 청설모가 안내하고 새들이 안심하는 사람, 나 자신이 자연이 된 양 흡족한 미소가 번지니 두 발은 싱그러운 흙내를 맘껏 들이킨다. 솔잎 사이로, 솔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 한 시선만으로 수백 수천 개의 섬세한 하늘과 닿으니 가슴 트이는 걸음, 허왕후 능 앞에서 참배 드리고선 계단을 내려 파사석탑 앞에 서다.

"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거친 바다를 헤치고 왔다. 어찌 황옥(黃玉)만 도와 이 언덕에 왔겠느냐? 천고에 두고 남쪽 왜의 노경(怒鯨, 침략)을 막아왔다."(김해를 답사한 뒤 쓴 일연스님의 찬시, `금관성 파사석탑` <삼국유사, 번역 최광식 외>) 일연스님은 찬시에서 천고에 두고 왜의 침략을 막아왔다고 하였다. 파사석탑이 가야와 신라, 고려조까지 왜의 침략을 막는 수호탑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반도 남쪽 경계를 수호하는 상징, 파사석탑에 그런 믿음이 자리 잡다 보니, 이후 안전한 뱃길을 기원하며 탑의 돌조각을 떼어가는 등 파사석탑의 화복 효험을 믿은 사람들로 인해 오늘날 파사석탑 형태가 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일연스님은 원전 `가락국기`에 실린 파사석탑 실물확인이 필요했는지 직접 김해를 방문해 탑을 친견하고, "탑은 네모반듯한 방형(바둑판 형태)으로 4면에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은 미세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 그 성질이 부드럽고 좋아서 이 지역의 종류가 아니다."(<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조)라고 하였다. 일연스님은 "이때에 해동에는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게 상교(像敎,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그 지방의 사람들(土人)이 믿지 않았으므로 본기(가락국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글이 없는 것이다. 제8대 질지왕 2년(서기 482년) 임인에 이르러 그 땅에 왕후사(王后寺)를 지었는데"(삼국유사 파사석탑조)라고 하였다.

현재 연구자들은 `상교가 들어오지 않아서`라는 기록을 두고 가야불교 전래시기에 대해 논쟁 중이다. 나는 일연스님이 `파사석탑` 조를 기록할 때 `파사석탑`이란 명칭을 사용한 정황을 근거로 허황후 도래 당시(서기 48년, 1세기)에 불교가 전래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로 했다. 종교를 비롯해 문화는 전래(이주인)-습합(토착인)-도입(보편화, 공식화)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2019년 파사석탑 암석학적 특성 분석 및 산지추정 분석결과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는 암석으로 밝혀졌다.
2019년 파사석탑 암석학적 특성 분석 및 산지추정 분석결과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는 암석으로 밝혀졌다.

일연스님은 파사석탑에 대해 "본기(가락국기)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김수로왕이 선포한 `대가락국`, 그 역사기록물인 원전 `가락국기`가 고려 당시에는 존재했다는 것인데, 혹시 조선 시대에도 그 책이 유통되지는 않았을까? 일연스님의 기록을 제외하고 원전 `가락국기`, 그 자취를 모르고, 현재 전하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삼국사기는 142종의 문헌을 인용했고 삼국유사는 185종의 문헌을 인용했다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가락국기` 권2 기이편 <奇異篇>에 "가락국 본기(駕洛國 本記)`는 문종대(1046~1048)의 대강(요나라 도종의 연호, 1075~1085)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文人)`이 편찬한 것을 채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마땅히 삼국유사를 택하겠다. 조선의 생활과 문화의 원두(元頭)이자 고형(古形)은 이 책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서동요, 모죽지랑가 같은 향가의 전수도 삼국유사가 해 낸 일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삼국사기`와 아울러 `삼국유사`가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있어 너무나 귀중한 문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스님은 파사석탑을 `파사돌`이 아니라 `파사석탑`이라고 기록했다. 불교의 위상과 권위가 높았던 그 당시, 종교적으로나 학식으로나 석학이셨던 일연스님의 이 텍스트에 주목해 보았다. `파사석탑` 명칭을 두고 오늘날 학계의 논쟁 같은 어떤 논쟁이 그 당시에는 없었을까? `삼국유사`에 실렸으니, 논란이 없었거나 논쟁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불교가 꽃피워지고 번성했던 통일신라기를 거쳐 건국한 고려, 고려조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백성들의 인식도 불교와 밀접했던 때였다. 당시 기준 한반도 불교사가 촘촘하게 구축됐을 거라고 볼 때(이를테면 한반도 불교 전래, 도입 시기, 불경, 저술 등 역사학계나 승가에서 혹은 국가적 차원에서 구축됐을 종교 학술적 환경)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에서 `파사석탑`이란 명칭을 수록한 것은 기록하는 자의 책임이 담보된 결과물이라고 본다. `삼국사기` 발간 이후 작업이었으니, 그 당시 정황이 나타난 자료를 참고로 상황을 추측해 보면 일연스님의 저술 활동이 얼마나 치열한 작업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단군신화를 비롯해 삼국사기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 비판적인 학자들과 대립하고 논쟁한 끝에 사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통해 집필한 저술가, 저자 일연스님의 행적에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그 당시 당연히 학식이 뛰어난 고승들도 많았을 것이고, 불교국가 고려조의 특성상 국가적 차원에서의 불교 체계 속에서 보수적인 종교역사가들에게 인정받지 않은 `파사석탑`이란 명칭 사용은 불가했을 거라는 관점에서다. 당장 고려불교계의 반발부터 극복해 내야 할 사안이었을 테니까. 그것(파사석탑)이 사실상 불탑이거나, 원전 `가락국기`에 충실한 `탑상`근거가 있거나, 확실한 근거로써 증명하고 인정받은 끝에 삼국유사 `탑상`편 `파사석탑`조 수록이 가능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의문을 가진 후대 사람들은 어떤 답을 들어야만 족할까?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으로 제작된 김해부내지도에는 호계 인근에 전각과 함께 파사석탑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 당시에도 파사석탑은 전각을 지어 받들만한 위상이었던가 보다.

김해 수로왕비릉 전경.
김해 수로왕비릉 전경.

"허황옥이 처음 올 때 큰 배에 돌을 실어 뒤집어지지 않게 하였다. 파사탑이 있는 곳을 물었더니 어찌 울창한 숲에 있는가?"(이학규 오언절구 <낙하생집19세기>, ※이학규1770~1835) 이학규의 시에서 보면 이학규는 파사석탑은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평형석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도호부 정현석 부사도 조선조 들어 폐사된 호계사 터 풀숲에 홀대받는 파사석탑이 안타까웠던지 1873년에 원래 있었던 자리라는 인식으로 허왕후 능원 안으로 옮겼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식이 지배적이던 조선 후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나는 파사석탑을 아끼신 정현석 부사와 원래 그 자리에 두지 않은 정현석 부사의 문화재 관리 행정행위를 대하며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설왕설래한다. 호계사(사찰)터에 있던 파사석탑을 허왕후 능원으로 옮겨버린 점, 불탑(부처님과 동일시)이 능묘보다 아래에 자리하니 그 위상에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탑상 대부분이 불탑(佛塔)인 사실에서 호계사 터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불탑이란 위상 확인과 사료적 정립이 수월하지 않았을까? "파사석탑의 부재 아랫부분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부분에 맞대어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출목(서까래를 받치려고 기둥열 밖으로 삐져나온 나무)의 흔적이 뚜렷하다.

가장 아랫단은 한 면에 4개씩, 그 이상의 부재에도 나타나 있는데 탑을 조성하면서 조각한 것이다."(허명철 박사 연구, 전지혜 논문 `김해 파사석탑의 원형에 대한 고찰` 등 참고) 지난 2019년에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특별전시가 있었고, 기획전시실 중앙부에 6층의 파사석탑이 김해에서 자리를 옮겨 전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 산학협력단(책임연구자 조호영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결과 <경남문화재자료 227호 김해 파사석탑의 암석학적 특성분석 및 산지 추정분석 결과보고서>는 대자율(암석이 지나가는 자성)과 X-선 형광, 적외선 분광 등 비파괴분석 결과 1층~6층의 재질은 상당량의 엽랍석(고온의 산성 열수(200~300도에 의한 2차 변질 광물)을 함유한 사암으로 나왔다. 석탑이 띠는 붉은 빛은 고온의 열수 관입에 따른 층리, 또는 균열에 따라 적철석이 불규칙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결과였다.

조호영 교수는 "정확한 암석분석을 위해서는 현미경 관찰 등 구성광물의 검증이 요구된다.", "경남 밀양과 완도 노화도가 엽랍석 산출지역이지만 이 두 곳의 암석과 파사석탑 재질을 비교해 보니 불일치하였다. 파사석탑은 퇴적암(사암)이지만 밀양과 노화도의 암석은 화산암이거나 화산암 기원의 암석이기 때문이다.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의 산출지를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일연스님의 말처럼 "우리나라에 없는 돌"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으로써 잠정 확인된 것이다.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19세기 정현석 부사에 의해, 20세기 파사석탑 연구를 위해, 21세기 이동 전시를 위해, 파사석탑이 몇 차례 해체된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훼손됐을 가능성은 없을까? 발굴하고 분석해야 증명되는 문화재의 특성상 원형 보존만이 최선이라 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부분이다.

파사석탑이 경남문화재자료 227호로 등재(지정일: 1996년 3월 11일, ※문화재 지정번호가 마치 중요도의 서열로 착각될 불합리한 소지가 있어 문화재보호법 개정ㆍ지정번호 폐지됨으로, 현 `경남문화재자료 파사석탑`)된 지 27년이다. 나는 시의원 재임 당시 파사석탑에 대한 김해시 차원의 기초조사가 단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음에 대해 시정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며, 2022년 제1차 추가 경정에서 파사석탑 기초조사 용역예산을 수립 반영한 적이 있다. 김해의 보물,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파사석탑 관련 학술축적과 스토리텔링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해시 차원의 기초조사 결과와 아울러 문화재청이 주도한 고려대학교연구소의 과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연구가 지속적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삼국유사 기사를 참고할 때 2천 년 전 김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허황옥이 떠나온 곳, 그녀의 고향 아요디아에 가면 혹시 답이 있지 않을까? 우선하여 인도 학계와 학술교류를 통해 파사석탑과 유사한 성분을 가진 지형지대 곳이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대의 인연에서 시작된 김해와 인도(유피주, 아요디야) 교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화교류를 넘어 장차 김해의 경제성 창출에 기여될 긍정성을 전망해 볼 때 삼국유사 허왕후 도래기사를 증명하는 유일한 물적 자료인 파사석탑이 그 매개가 될 수 있음에, 그러한 기대와 소망을 담아 파사석탑 앞에서 절하고 세 바퀴 탑돌이를 하고 다시 탑을 향해 절하였다. 허왕후 능원에서 한 걸음 딛고 올려다본 하늘은 높고 청명하고 한 시선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드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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