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03:21 (일)
"한국전쟁 때 16개국은 어떻게 한국을 도왔나"
"한국전쟁 때 16개국은 어떻게 한국을 도왔나"
  • 황원식 기자
  • 승인 2023.06.15 23: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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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한국전쟁 73주년 `감사눈물`
목숨 바쳐 한국 도운 모든나라
미군 포함 총 34만 1000여 명
한국전쟁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16개 국가들.
한국전쟁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16개 국가들.

"필리핀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았을 때 일입니다. 이분들이 우리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냈던 나라에서 찾아와 준 것이 너무 고맙고, 우리가 지켜낸 나라가 지금은 강대국이 돼서 고맙다`고 울었습니다. " 의사 출신인 홍태용 김해시장이 지난달 22일 경남매일 CEO아카데미에서 세계의료봉사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 대목에서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외국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다.

오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3년째 되는 해이다. 한국전쟁은 지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교전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간 이어졌으며, 명목상으로는 현재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도와주는 나라는 모두 16개국(필리핀, 에티오피아,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호주, 콜롬비아, 튀르키예, 그리스)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총 3만 9000여 명이 파병했고, 미국을 포함할 경우 총 34만 1000여 명에 이르렀다.

▲ 필리핀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참전한 국가 중에서 필리핀과 에티오피아는 대대급 부대를 파병했다. 필리핀 대대는 1950년 9월 2일 시민들이 운집한 라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파병식을 가졌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보내온 것이다. 대대는 미 제65연대에 배속돼 임진강 부근 군자산을 공격해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공로를 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의 기관총을 파괴한 소충수, 부상당한 채 끝까지 화력지원을 한 경기관총 사수, 사선을 넘나들며 부상자를 후송한 위생병은 장병들의 귀감이 됐다.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지난 1935년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당한 적이 있기에 세계평화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결의를 보였다. 대대는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화천 봉당덕리에서 중공군과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다. 대대는 4시간여에 걸친 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살아 돌아온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 자손에게까지 가난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는 군부 쿠데타로 공산주의 체제가 됐고, 참전용사들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를 도왔다는 이유로 이 같은 고초를 겪게 됐다.

▲ 태국

태국은 1000명에 달하는 1개 대대의 육군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태국은 육ㆍ해ㆍ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이다. 태국 대대의 용감성은 포크찹(porkchop)고지 방어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세 번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치며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태국군은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 참전국 중 유일하게 공군부대만 파견한 국가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군으로부터 무스탕 16대를 넘겨받아 일본과 한국의 기지에서 근접항공지원과 차단폭격잔전에 가담했다. 대대는 북한 지역에 산재한 철교, 육교, 터널, 철도조차장 등을 폭격하는 차단작전을 수행해 큰 전과를 올렸다.

▲ 미국

미국의 참전 병력은 다른 참전국의 파견 군대를 모두 합한 것의 몇 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미육군은 전쟁 기간 중 최고 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미육군이 실해한 작전은 사실상 한국전쟁 전체 작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해군은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미 공군은 전쟁 초기단계부터 마지막까지 북한군과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혀 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 캐나다

캐나다군은 튀르키예처럼 여단급 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캐나다군은 영국군과 교리 면에서 매우 유사했고, 튀르키예가 겪어야 했던 언어소통 문제도 전혀 없었다. 캐나다 제2대대는 가평전투에서 탁우러한 전투능ㄹ력과 전투의지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프랑스

프랑스군은 1951년 지평리 전투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미군 장병들이 프랑스군을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대대는 원주 전투, 쌍터널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미 제23연대와 함께 혈투를 벌여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반격의 발판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영국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했다. 영국군이 크게 기여한 것은 중군군 5차 전역(4월 공세) 당시 벌인 임진강 남안의 설마리 전투에서이다. 특히 영국 해군은 미 해군함정과 함께 동서 해상의 작전에 동참했다. 이후 영국은 연인원 약 1만 7000명의 해군병력이 한국작전에 참가했으며, 50여 척의 함정이 종전 때까지 교대로 해상작전을 수행했다.

▲ 네덜란드

네덜란드 대대는 대대급의 전투부대로는 잘 훈련되고 책임감이 강한 부대였다. 영어를 구사하는 장병이 많아 미군과의 협조도 원활했다. 이들은 미 제2사단에 배속돼 중부전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했다. 대대는 원주에서 북한군 제5군단 예하부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 1110명을 살상 혹은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 벨기에

벨기에 대대는 미 제3사단에 소속된 영군군 제29여단에 배속돼 작전을 수행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그들의 전문적인 전술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특히 중공군이 공세에 맞서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며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서측 영국 제 29여단의 철수를 도왔으며, 큰 인원손실 없이 위기를 벗어났다. 이 전투로 미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소대는 유엔 참전국 중에서 가장 규모가 미니 부대였다. 룩셈부르크는 인구가 20만 명에 불과해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가 곤란했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전쟁 기간 내내 48명의 병력을 유지하며 벨기에 대대에 소속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 뉴질랜드

뉴질랜드 해군은 8척의 함정을 교대로 투입했다. 또한 포병부대를 파견해 화력으로 작전에 기여했다. 이들은 호주 부대와 나란히 영연방 군에 속해 중공군의 신정공세 이후에는 영국의 미들색스연대 보병대대, 캐나다 보병대대에 대한 화력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가평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호주

호주 제3대대는 사리원 전투에서 적극적인 백병전을 벌여 후퇴 중인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작전속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후 이들은 영유리 전투, 박천 전투,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였다.

▲ 콜롬비아

콜럼비아군은 참전 규모(프리깃함 1척, 지상군 1개 대대)는 작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유일한 참전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 튀르키예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육군을 여단급 규모로 파견한 국가는 튀르키예와 캐나다였다. 튀르키예는 한때 중립을 표방하기도 했으나 북한의 남침 직후 한국에 4500명 규모의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유엔 회원국들의 환영을 받았다.

▲ 그리스

그리스는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아 양국의 우호관계는 밀접했다. 그로 인해 그리스는 한국전에 지상군 1개 대대와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했다. 특히 그리스 제13수송편대는 1950년 일본에 도착한 이후 장진호 전투를 지원했으며, 미 해병사단을 직접 지원해 전사상자를 후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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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fadsf 2024-04-21 22:58:00
오타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