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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난민과 단사리
노후난민과 단사리
  • 이광수
  • 승인 2022.09.18 1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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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br>
이광수 소설가

90년대 세계 제1의 국부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던 일본경제는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잃어버린 20년의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전 수상 아베가 `아베노믹스`라는 극약처방(0%대 금리와 양적완화)으로 잠시 살아나는 듯했던 일본경제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직도 바닥을 헤매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13년을 전후해 잃어버린 20년의 후유증으로 노후난민이 급증했다. 40~50대의 중견 근로자들이 대거 권고사직 당해 실업자가 양산되면서 활기를 잃은 일본경제가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자 단사리(斷捨離)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단사리`란 끊고(斷), 버리고(捨), 떠난다(離)는 뜻이다. 번뇌를 끊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리고 집착과 이별하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이때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야마시타 히데코가 쓴 <단사리>라는 책은 일본 국민들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녀는 이 책 덕분에 단사리 전문 컨설턴트로 변신해 일약 유명강사가 되었다. 

잃어버린 20년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권고사직 압박으로 거리로 내몰린 근로자들은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종신고용을 자랑하던 일본은 비정규직 일용직 근로자로 넘쳐났다. 미국 국채의 80%를 보유하고,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번영을 구가하던 일본경제는 부동산 버블붕괴로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도쿄의 번화가인 신주쿠에는 한 때 워킹푸어(Walking Poor)인 노숙자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이른바 프리터족(freeter: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도 이 때이다. 퇴직 후 노후 준비가 안된 직장인이 40%대에 이를 만큼 노후난민이 급증해 일본 중년세대의 좌절감은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나라의 일이기도 하다. 한 설문조사에서 퇴직 후 노후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60%대이고, 고령자 빈곤율이 OECD평균의 3배(43.4%)가 넘어 자의든 타의든 이들 중 일부가 노후난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노후난민양산의 반동으로 시작된 일본의 단사리는 은퇴를 앞둔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굳이 경제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이 들어 단순하게 살겠다는 뉴 트로(신 복고)생활방식이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면 지금까지 고수했던 번잡한 생활의 축소조정은 불가피하다.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삶이 필요하다. 과거를 털어버리는 일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집착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후의 삶은 불행하다. 광속도로 변해가는 삶의 트렌드는 구세대들에겐 적응성의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제 삶과 일의 방식에도 세대 간의 인식차가 너무 커서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도 권위(위계질서)가 사라졌다. 특별권력관계였던 공직마저 국민에 대한 봉사자(public servant)가 아닌, 공무를 서비스하는 사무원(public officer)으로 변했다. 얼마 전 공무원들이 월급 적다고 피켓시위까지 했다. 국가공권력의 최후 보루인 검. 경마저 제 밥그릇 싸움으로 암투하고 항명하는 등, 국민의 따가운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지경이라 유구무언이다.

세계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한국인의 삶은 무섭게 급변하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디지털을 상용화한 일본은 겨우 30% 정도의 디지털화된 사회시스템을 구축한 반면, 한국은 80%를 능가할 만큼 모든 공. 사적인 일의 운용시스템이 디지털화됐다. 이는 한국인의 빨리빨리 DNA가 낳은 태생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결국 시대흐름에 잘 대응한 결과이다. 요즘 MZ세대를 중심으로 소유보다 렌털과 리스를 선호하는 비소유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단사리 역시 단순하게 살기 위한 바람직한 생활태도라고 생각한다. 단사리와는 거리가 먼 호더(Hoarder)족이 있다. 손에 들어온 물건은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고 심한 경우 필요 없는 물건이나 쓰레기도 집에 쌓아둔다. 모든 걸 쉽게 못 버리고 저장하는 사람들을 정신의학적으로 저장강박증소유자라고 한다. 최근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건강한 삶의 행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잘 사는 것보다 잘 버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에코디지털(eco digital)의 표방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전형이다. 다원화 시대를 맞아 온갖 신물질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 사마광이 말한 `염일 방일`의 고사처럼,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마음의 병인 미움, 원망, 나쁜 기억들은 쌓아두지 말고 지워버리고, 과유불급인 물욕도 줄여 나가야 한다. 만년인생은 지난 삶을 정리하는 축소지향의 삶이다. 단사리는 노후난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명한 생활방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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