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1:26 (토)
사람 기르는 찻자리
사람 기르는 찻자리
  • 김기원
  • 승인 2022.08.10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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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br>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김기원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시대 명재상 이원익 대감은 지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승문원에 근무하면서 아침에 내리는 차 한잔을 통해 주변의 인품을 더 곱게 닦았다. 당쟁이 심할 때라 불필요한 사람을 사귀거나 어울리기를 싫어해 늘 차를 즐기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사로운 모임에 잘 나오지 않았다.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 율곡 이이만이 찻자리를 자주함으로 그의 평소 인품을 알아봤다. 슬기로움을 알고 매사에 조심성 있게 존경스러워 했다. 1573년(선조 6년) 명나라에 성절사로 북경에 갔다. 그는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유창한 서예 솜씨와 글재주, 시로 찻자리의 솜씨를 드러냄과 동시에 멋의 향유가 명나라 조정까지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고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임금의 어가를 호송했다. 이어 좌상(左相)이 돼 누차 소문을 올려 국사를 논했으나 서인의 배척을 당하고 낙향해 시골에 있을 때 지방 선비 간에 찻자리 대화로 인재를 찾았다. 그뒤 영의정이 돼 찻자리 인재를 잘 등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여러 장수들 중 이순신의 활약을 가장 높이 평가했고, 이순신의 벗이었던 서애 유성용마저 비판할 때에도 그는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라며 이순신을 통제사로 청거했다. 또 탄핵돼 모든 관리들은 극형을 지지했으나 이원익 대감의 반대로 방면돼 오늘의 이순신 장군이 있고 공적이 있다.

1631년(인조 9년) 1월 10일 인조가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 찻자리가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 그는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해 반대파로부터도 차 한 잔 나눔으로 호감을 받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그를 `오리 정승`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차를 즐겨 마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최근 전 세계를 감동시킨 반도체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시대의 흐름이 경제적 우위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속도는 예측 불가하다. 차 한 잔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청적(淸笛)되기를 바란다. 정서의 멋으로 세계의 격돌을 순화시키며 세계적 경제 역풍을 극복해 가난을 윤택한 인격자로 만들어 가는데 노력하는 국민정신 운동에 차 문화 운동을 동행시켜 재조명할 필요가 동시에 요구된다. 잃어버린 나, 양심은 물질적 가치 평가보다 미의 애국심을 찾자고 사색하는 도덕적 모습으로 찻자리를 푸는 것도 나라 발전과 사회계몽에 계기가 된다. 그러나 반려동물에 인생을 의지해 삶을 찾기보다 당당한 자아의 자세가 필요한 시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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