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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와 대영제국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대영제국
  • 경남매일
  • 승인 2022.06.1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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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면 패권국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무역의 통로(물류)를 장악한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가진다. 세계의 자원과 그 자원의 통로를 장악하고 있는 해양제국 중에서만  패권국이 출현할 수 있었다. 패권국이 바뀔 때는 항상 전쟁이 있었고, 전쟁에는 영웅이 존재한다. 16세기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 제독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시기 `한산도 대첩(1592)`을 이끈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비슷한 시기에 `칼레해전(1588)`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두 해전사의 영웅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더 많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노략(擄掠)질`이라고 한다. 이를 제도화한 것이 `사략(私掠,privateering)`이다. 16세기 영국여왕이 발부한 사략허가장(Letter of Marque)을 받은 개인이 무장시킨 사략선(私掠船, Privateer/Corsair)으로 타국의 상선을 노략질했다. 

해군 함장이 퇴직 또는 휴직계를 내고 사략업을 하거나, 박봉에 시달리던 수병이 탈영해 사략선에 합류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은 알고 보면 노예무역과 해적의 나라였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략 해적은 프랜시스 드레이크다. 그는 13살부터 노예무역을 하다 해적으로 전직했지만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총애해 영국 해군 제독까지 오른다. 

대항해 시대 신항로의 개척에 앞장섰던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일찍 신대륙 식민지를 개척해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를 편성했다. 
당시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 문제로 스페인과 대립하였다. 여왕은 드레이크에게 카리브 해 일대의 스페인 영토를 공격토록 했고, 1585년에 드레이크는 29척의 함선과 23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사략선을 이끌고 신대륙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를 깨끗하게 약탈했다. 설상가상 1585년 영국이 스페인 지배하의 네덜란드와 동맹까지 맺게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영국을 공격하기로 한다(영국-스페인 전쟁, 1585~1604). 

1587년 4월 19일,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쟁 준비를 방해하기 위해 드레이크의 지휘 아래 전투함 16척과 경무장 함선 7척으로 구성된 사략선이 스페인 카디즈로 기습 출동했다. 그 곳에서 스페인 함선 37척을 나포하거나 불태워 버렸는데, 이러한 드레이크의 기습으로 인해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동은 1년이나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588년 8월 8일 도버 해협과 프랑스령 칼레 앞바다에서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함대가 함포전을 개시했다. 세계 3대 해전 중 하나인 칼레해전이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화공을 피해 닻을 끊고 북해로 피항했는데 태풍으로 속절없이 난파되었고, 설상가상 한 해 전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불타버린 식량 보관용 오크나무통을 급조하느라 목재를 충분히 말리지 못한 탓에, 나무통 안의 음식과 물이 부패해 많은 승조원이 병사했다. 패주한 무적함대가 9월 말 스페인으로 귀항했을 때는 44척의 함선과 수천 명의 유능한 승조원ㆍ군인을 잃은 후였다. 

이 전쟁 이후 영국은 눈부신 성장을 했다.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인도를 경영했고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북아메리카에는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는 도시 `버지니아`를 세운(1607) 이후 1921년까지 지구 육지의 1/4를 차지하는 거대한 패권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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