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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이야기(出家記) ④
출가 이야기(出家記) ④
  • 경남매일
  • 승인 2022.05.31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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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여여정사 주지ㆍ(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옛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이후엔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를 하리라"란 시가 있다. 조선 전기의 관리 장만(張晩)의 시다. 시의 내용처럼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것을 피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 하지만 신중하지 못한 충동적이고 막연한 선택은 오히려 더한 어려움을 만날 수 있기에 새로운 길을 선택할 때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사람들은 흔히 하던 일이나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짓겠다" 한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농사는 땅에 씨만 뿌리면 저절로 되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적절한 기후와 씨뿌리는 적기, 김매기와 수확까지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종합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농학 박사라도 실제의 농사에서는 경험이 없으면 경험 많은 농부에게 배워야 농사를 망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인생이 마음 같지 않게 되면 "산에 들어가 중이나 되지"라고 한다. 그러나 농사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속세의 인연을 끊고 입산하여 수행자가 된다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이겠는가. 

운명을 합리화하는 것 같지만 타고난 팔자소관이 아니고서야 어찌 세속을 벗어난 사문(沙門)이 될 수 있으랴. 사주를 흔히 전생의 인과응보가 여덟 글자로 나타난 업보도(業報圖)라 하는데 스님들 사주는 대개가 처복과 자식 복이 없는 외로운 팔자로 나타난다. 세상에서는 꼭 필요한 두 가지 복이 수행자에게는 없어야 오히려 수행하는 데 걸림이 없으니 소위 `절대적으로 좋은 사주`도 존재하지는 않아 보인다.

어린 나이에 마음의 병을 얻어 청년기를 방황하다가 치료차 입산하게 되었고, 산에서 여러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다. 밀양 표충사 뒤의 층층골 토굴 살이 중에 `영가무도`라는 선가(仙家) 수행을 하는 배 선생님을 만나 수행법을 배우게 되었다. 언젠가 자인 스님과 배 선생님의 의견 대립 후 스님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토굴로 돌아가 버렸고 이후론 보기 어려웠다.

한 석 달 지날 즈음 옆 산막에 30대 중반의 스님과 내 나이 또래의 청년이 왔다. 당시 층층골에는 산막 3채가 있었는데 필자가 처음 왔고 다음에는 배 선생님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더 왔다. 누가 먼저 방문했는지 기억은 아득하지만 가끔 서로 들를 일이 생겨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인물도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신선 같았는데 가끔 거처를 방문해 보면 둘은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장기를 두거나 대청마루에서 요가를 하였다. 특히 스님은 양다리 일자 스트레칭부터 모든 요가 동작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아무튼 방문할 때마다 친절히 맞이하며 다과도 내어 주었다. 

몇 번의 만남 후 수좌 스님께서 어느 날 대뜸 "젊은 처사님은 이렇게 막연히 산 생활 하기보다 출가하는 게 어떻소"하시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 않은 말을 들었지만 상대가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기분 나쁘지는 않아 "저는 출가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답했다. 사실 출가 권유를 처음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입산할 때 잠시 의탁했던 암자의 친척 아주머니가 은근히 출가하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산에 온 것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고 출가는 단 1%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인생 목표는 집안을 일으키고 세속적인 성공과 함께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출가라니… 속으로 이분들이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네 싶었다. 

당시에 출가란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을 비관한 나약한 사람들의 선택 또는 정말 정해진 운명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해당된다고 생각했었다. 건강을 빨리 회복해 그동안 병치레로 뒤처진 시간들을 보상받고 세상에 멋지게 복귀하겠노라는 생각이 가득한 나에게 출가라니. `내가 세상에 적응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나약하게 보인단 말인가`라는 오해 아닌 오해도 했었다.

그러나 내게 출가를 권유한 분들은 나에게 내재된 출가의 인연을 보았던 것 같다. 출가의 뜻이 전혀 없었던 인생의 좌표에서 몇 년 후 출가는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펼쳐지는 인생의 장은 매번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생은 뜻대로 되었다고 전부가 옳은 것도 아니며 뜻대로 안됐다고 모두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정신계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세상은 영적 진보를 위한 학교다"라는 경구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에서 좋든 싫든 온몸으로 겪는 다양한 체험이야말로 인간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며 또한 최고의 학습장도 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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