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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능력이 뛰어났던 김해부사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던 김해부사
  • 최학삼
  • 승인 2022.02.24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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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 이야기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 유태좌 부사(재임기간: 1821년 전후)

 자 사현, 호는 학루이다. 자와 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장에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순조 때 대사간이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학루문집」이라는 시문집이 전한다고 한다.

△ 허 전 부사(재임기간: 1864년 3월~1866년 7월)

 자는 이노, 호는 성재 또는 성암, 그리고 불권당이다. 1840년 기린도칠방, 1844년 전적, 지평을 거쳐 1847년 함평현감을 지냈다. 1850년 교리, 경연시독간,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참가해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였다. 고종 1년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사로 「수전록」, 「하관지」, 「성재집」, 「종요록」 ,「철명편」을 비롯해,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 등이 있다. 성재 허 전은 김해부사의 임기가 끝난 후에도 수로왕릉 내에 숭선전 건립 당시 성재 허 전이 상량문을 썼다고 한다. 그는 병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고종 23년(1886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해부사를 거쳐 간 인물은 물론 조선시대 통틀어서도 성재 허 전의 학문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

 조선 중후기 한강 정구(1543~1620), 미수 허목(1595~1682) , 성호 이익(1579~1624), 순암 안정복(1712~1791), 하려 황덕길(1750~1827)로 연결되는 학맥을 이은 성재 허 전은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5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영남지역에 큰 학풍을 일으켰다. 동시에 가레의 보급과 농지 개혁의 실사구시레 진력하여 많은 저서를 남기는 등, 영남의 후학들에게 대동사회의 미풍양속을 남겼는데, 그에게 훈도를 받은 제자가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해 국권 회복에 아바지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재 허 전은 이조판서로 재임하던 시절 김해 사충단의 사충단비기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언적 부사(재임기간: 1541년)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였던 희재 이언적은 김해부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을 열거하였다. 또한 이언적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구인록」, 제례에 관한 「봉선잡의」,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현석 부사(재임기간 1870 6월~1873년 12월)

 정현석 부사는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저서도 많았는데, 특히 교방의 노래와 춤에 관한 책인 「교방가요」를 진주목사 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김해부사 재임 중에 완성하였다. 그 외에도 「계비번사고」, 「계비고」, 「유원고」, 「경개록」, 「여지고」, 「기계도설」, 「오총도관견록」, 「시종록」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정현석 부사는 김해부사 재임 중에 임진왜란 때 김해의 사충신 중 한 사람이었던 송 빈이 전사한 송공순절암에 송공준설암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정현석 부사는 고종 8년 신미년에 사충단을 건립하고 나서 사충단비각기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정현석 김해부사는 예술적 능력 또한 뛰어났다. 송공순절암에 각인된 송공순절암의 글씨도 직접 썼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절한 바위인 의암에 각인된 의암 글씨도 진주목사 재임 중에 쓴 것이다. 또한, 정현석 김해부사는 김해의 미칭을 중국의 금릉으로 정하여 불렀다. 중국의 금릉이 양쯔강유역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듯이 김해도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금관가야의 고도라서 그런 비유를 했을 것이다. 김해의 임호산도 중국 금릉의 봉명산에 비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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