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5:39 (금)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 이광수
  • 승인 2022.02.13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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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풍석(楓石) 서유구는 조선 정조 때의 대학자로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다산이 조선 최고의 스타학자였다면 풍석은 무명학자에 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명군 정조의 총애를 받는 엘리트 관료였다. 다산은 신유사옥으로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1표2서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 499권(지금의 편, 장해당)의 책을 저술했다. 풍석은 다산에 비해 양반 사대부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모두 후학들의 추앙을 받았다. 다산에 비해 풍석이 홀대받은 것은 두 사람의 학문적 지향점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둘은 실학자였지만 다산은 당시 주류였던 유학의 정통 분야인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연구에 몰두했다. 조선유학의 지향점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사람다움(德)의 인격 도야와 도의정치 구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풍석은 파주장단에 귀농해 경학과 경세학을 외면한 채 농학, 천문학, 공학, 수학, 요리학, 어업, 의학, 예술, 상업 등 시골에서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사대부의 공리공론적인 세풍을 개혁하는 실용농업정책서의 집필에 일생을 걸었다. 실학자 풍석의 30여 년에 걸친 고독한 집념의 저작물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판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라 부를 만큼 그 내용과 항목이 방대하다. 총 16개 분야에 113권 54책 252만 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실용대백과사전이다.

 이처럼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실학자의 생애를 보면 다산이 정조의 총애 속에 신유박해로 18년간 유배생활로 벼슬길을 놓은 반면, 풍석은 18년간의 파주장단에서의 귀농 기간은 있었지만 순조 때까지 30년간 승승장구했다. 다산과 풍석은 모두 대과문과급제자로 다산은 1789년 60명 중 2등(갑과)으로, 풍석은 1년 뒤인 1790년 40명 중 24등(병과14위)으로 급제했다. 다산은 한미한 집안출신인 반면, 풍석은 조선명문세가 벌열인 달성서씨 후예이다. 풍석은 진퇴가 신중해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었지만 다산은 문제적 범생(천주교 입교)으로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정조는 명군답게 집권 초기부터 문신양성책으로 경사강의(經史講義)라는 신하재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때 시경(詩經)을 분석하는 강의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참여했다. 16년 동안 25회에 걸쳐 실시했던 경사강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얼마 전 방영된 사극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가 세자였을 때 궁녀 성덕임과 시경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읽고 암송하는 모습에서도 정조의 시경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시경강의에서 590문제를 출제해 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과정을 밟던 초계문신들에게 40일간의 말미를 두어 답을 써 오라고 명했다. 이것도 모자라 20일을 더 연장했는데 천재 다산도 무척 힘든 시험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는 579개 문제와 답이 실려 있다. 수험자 18명 중 풍석의 답안은 181개로 전체의 31.3%인 반면, 다산은 117개로 20.2%를 차지해 풍석의 답안이 훨씬 많이 채택되었다. 시경 강의는 두 사람에게 큰 이력이 되었다. 다산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추억으로 이 시경강의를 들었다. 자신을 총애한 정조의 어평(御評: 임금의 답평)을 두고두고 써 먹었다.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다면 이와 같을 수 있으랴"는 정조의 어평이었으니 오죽 감읍했겠는가. 다산은 어평을 자신의 유언인 <자찬묘지명>에도 싣고, 그의 형 정약전과 아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을 자랑삼아 말했다. 반면 풍석은 그의 묘지명에 정조의 어평을 싣지 않았고 자식에게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다산과 풍석의 일생정리도 비슷한 면과 다른 점이 있다. 다산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후학양성과 저술에 힘쓰다 풀러난 후 고향 양주에서 야인으로 머물렀다. 풍석은 벼슬을 접고 18년간 고향 파주장단에 귀농해 <임원경제지> 집필에 몰두하다가 다시 입궐해 30년간 벼슬을 이어가며 집필했다. 다산은 환갑 때 자신의 유서인 <자찬묘지명>에 자기 개인사를 상세하고 길게 서술했는데 무려 1만 2316자에 이른다. 풍석은 79세에 <오비거사생광자표>라는 묘지명에 828자를 서술했다. 다산은 `자신의 경세학은 지금의 쓰임에 구애받지 않고 기준을 제시해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연구`라고 했다. 당대 활용보다는 이상적인 통치 기준을 제시해 국정혁신을 꿈꿨다. 반면 풍석은 경세학은 흙으로 끓인 국인 토경(土경)이요, 종이로 만든 떡인 지경(紙경)이라며 비판했다. 두 사람 모두 국정 혁신을 주장했지만 다산이 이상적인 경세학자였다면, 풍석은 현실 지향적인 농촌 경제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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