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4:10 (토)
공주가 탄 배의 깃발
공주가 탄 배의 깃발
  • 도명 스님 
  • 승인 2022.01.03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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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사정담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보통 글을 분류할 때 픽션과 논픽션으로 나눈다. 픽션이란 작가가 상상해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말하며 소설과 희곡 같은 분야다. 이와 달리 논픽션이란 실제 일어났던 일이나 경험을 적은 글이며 여행기, 역사서가 이에 속한다.

 가야의 역사와 허왕후 도래를 기록한 `가락국기`는 <삼국유사>의 편찬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서였다. 때문에 저자인 일연 스님은 이전에 있던 `가락국기`를 `지금 간략하게 옮겨 적는다`(今略而載之)라고 서두에 적어 놓았다. 따라서 `가락국기`는 일연 스님의 창작이 아닌 논픽션으로 봐야 한다.

 고려 문종조 금관지주사 문인(文人)이 `가락국기`에 서기 48년 허왕후 도래를 기록하였고, 그것을 스님이 <삼국유사>에 옮겨 적었을 때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기록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조상 중에서도 특히 시조(始祖)를 중시한 전통이 있었기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김해를 터전으로 삼았던 김해 김씨를 비롯한 가락 종친들은 기록과 구전을 통해 사실적인 조상의 역사를 전승하였을 것이다.

 또한 `가락국기` 기록의 사실성은 현재의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의 위치뿐 아니라 임시궁궐인 신답평과 나성의 축조 기사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그녀가 타고 온 배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그 대목은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꼭두서니 깃발을 휘날리며"라는 구절이다.

 그런데 `가락국기`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은 `꼭두서니 깃발`을 두고 해석을 달리한다. `꼭두서니로 물들인 붉은색 깃발이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반면 `꼭두서니 문양(文樣)을 그린 깃발이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필자도 `가락국기`의 이 대목을 볼 때마다 과연 꼭두서니 깃발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었다. `꼭두서니`란 넝쿨 식물로 잎이 네잎 클로버와 비슷하게 사방으로 퍼져있고 좁은 모양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천연의 붉은 물감을 들일 때 그 뿌리를 염료로 사용해왔다.

 필자는 지금까지 허황옥 공주가 올 때 휘날렸다는 `천기`란 꼭두서니 잎 모양을 문양으로 한 깃발이며 이것을 배의 앞쪽에 세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문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는데 그것은 KNN 방송국의 <과학으로 본 허황옥 3일>이란 다큐멘터리였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진재운 감독은 인도의 고대 선박에 대한 기록과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허왕후가 타고 온 배의 형태를 고증했다.

 당시 대양을 항해한 선박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붉은색 쌍돛을 달고 있었으며 돛대 위에는 붉은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꼭두서니 깃발이란 꼭두서니 문양의 깃발이 아니라 단순히 붉은색 깃발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다만 `붉은색 돛을 뜻하는 비범(緋帆)`처럼 `붉은색 깃발을 의미하는 비기(緋旗)`로 쓰지 않고 천기로 쓴 것은 동일한 붉은색을 표시함에 있어 중복을 피하는 한문의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비(緋)와 천으로 한자를 달리 쓴 것으로 보여진다.

 혹자는 문양이 있는 깃발이든 그냥 붉은색 깃발이든 `뭐 그리 중요하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가야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는 작업은 가야의 원형을 찾아가는데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허황옥 공주 당시 인도의 선박은 대양 항해가 가능한 견고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역사를 보면 인도는 고대부터 해양 강국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삼면이 바다로 싸여 있어 일찍부터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이 발달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해양의 패권자임을 자부하는 영국의 식민통치로 인도의 찬란한 해양 문화는 많은 왜곡과 축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수난을 모면한 귀중한 자료들이 남아 있어 인도의 옛 영광을 알 수 있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고 대개는 승자가 독식하는 방식이다. 역사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결국 나라도 온전하기 어렵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가야실을 개편하면서 전시물을 대폭 늘렸다. 이런 움직임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가야의 흔적을 전시에 반영하는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야사 연표에서 김수로왕을 빼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과연 건국자가 없는 국가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거 일본의 관제 사학자들은 가야 초기 역사와 김수로왕을 지우기 위해 42년 가락국 건국 기록을 부정하고 가야의 건국이 3~4세기 정도였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수로왕을 신화로 치부하려는 의도는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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