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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왕후와 불교의 전래 ③ 태국 아유티아설
허왕후와 불교의 전래 ③ 태국 아유티아설
  • 도명 스님
  • 승인 2021.09.27 2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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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잘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지명(地名)들도 세계 역사에서 보면 바뀌거나 이동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기원전 3세기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자기가 정복한 여러 곳에 도시들을 건설하였고, 그 도시들은 자기의 이름을 본 따 알렉산드리아라 지었다.

이후 많은 알렉산드리아가 생겨났고 몇몇 도시는 지금까지 이름을 바꿔 내려오고 있다.

근세 가야불교의 초기 연구자인 이종기 선생은 이 점에 착안하여 태국 메남강 유역의 `아유티아`를 허왕후 일행의 출발지로 보았다.

그는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작성한 `서기 1세기의 세계 교류도`를 근거로 하여, 기원전 인도 아요디아에 살았던 허왕후 일족이 해상 교류를 통해 태국 메남강변에 `아유티아`를 건설하여 살다가 가락국으로 왔다고 하였다. 이종기 선생이 태국 아유티아를 허왕후의 출발지로 지목한 원인 중 하나는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가 너무 먼 거리에 있어 당시의 항해술로는 한 번에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 북부의 아유디아는 서기 1세기경 쿠샨 왕조의 공격으로 멸망했고, 이러한 영향으로 태국의 식민도시였던 아유티아 또한 위기에 봉착한다. 때문에 그 지도부의 일부가 베트남의 하이난과 중국의 푸저우를 경유하여 일본의 큐슈에 얼마간 있다가 가락국으로 왔다고 보았다.

허왕후 일행이 태국 아유티아에서 5월에 계절풍을 따라 항해하다 보면 가야보다 일본 큐슈에 먼저 도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그곳에서 얼마간 휴식과 정비를 한 후에 가락국으로 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실제로 큐슈 지역 여러 곳에서 초기 가야와 관련성 있어 보이는 신사(神祠)를 발견하고 설화들을 채집하면서 이것을 허왕후 일족이 큐슈 지역에서 머문 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허왕후가 낳은 10남 2녀 중 한 명인 묘견 공주가 당시의 해상왕인 김수로왕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으로 가서 권력을 잡았고, 일본 최초의 여왕이 된 히미꼬(卑彌呼))라고 보았다. 그녀가 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삼국사기>에는 실제로 히미꼬가 서기 173년,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때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중국 진수의 <삼국지. 왜인전>에도 여인국 히미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므로 그녀가 역사 속의 실재 인물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종기 선생의 일본을 경유한 `태국 도래설`은 수차례 답사를 통해 도출해 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인류학을 전공한 그의 딸 이진아 박사도 인도 갠지스강 지류인 사라유강의 중류에 위치한 아요디아에서 바다로 나오려면 900㎞ 강을 내려와야 하며, 그곳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거쳐 2만 5000리를 항해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보았다.

그녀는 고대 아요디아의 식민지였던 태국 아유티아에서 출발해 해양도시들을 경유한다면 충분히 가락국에 도달하는 항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주장들>

허황옥 도래설의 또 다른 주장으로는 최근 부각된 인도 남부 `아요디아 꾸빰 도래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인도 남부의 타밀어와 한국어가 2000여 단어에서 유사성을 보이며, 고대항로를 고려하면 해안에 위치한 `아요디아 꾸빰`을 <가락국기>에 나오는 `아유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2005년 서울대 김종일 교수와 한림대 서정선 교수는 2세기 가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예안리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의 유전자가 인도 남부의 타밀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또 일부의 불교학자들은 우리나라 불교의 관음신앙이 첸나이를 중심으로 한 해양의 도시에서 시작됐고 바다를 통해 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가야는 임나다`라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며 임나는 일본 열도 내에 있었던 삼국과 가야의 분국(分國)이라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분국설>을 펼쳤던 북한학자 김석형도 허왕후의 도래를 북큐슈 또는 북큐슈를 거쳐서 온 것으로 보았다.

또 허왕후가 중국 발해만 인근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해류를 감안하면 황해에서 제주해협을 지나 가락국까지 항해가 가능했을 뿐 아니라 파사석탑을 구성하는 파사석이 그곳에서도 난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허왕후의 출발지에 대한 여러 학설이 분분하나, 당시 정황을 고려했을 때 인도 도래설이 유력해 보인다. 왜냐하면 토인비의 기원 전후 해상 교류도나 타밀어와의 언어적 친연성은 인도와의 교류 가능성을 높여주고, 전 세계의 고대 결혼 신화 중 허황옥의 결혼 신화만큼 사실적이고 세밀한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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