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
배롱나무 꽃
  • 이은정
  • 승인 2021.08.2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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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수필가
이은정 수필가

여름 한낮 땡볕이 쏟아진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가 대지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주무른다. 거리에는 아스팔트가 녹아나고 사람들은 모두 그늘 속으로 숨었다. 조금만 밖에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 나뭇잎들또한 늘어진 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여름을 견디고 있다.

그러나 가로수 한쪽 귀퉁이에 해바라기 처럼 태양을 향해 바짝 고개를 쳐든 불꽃 같은 꽃이 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번 피면 백일을 계속해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꽃 일명 목 백일홍이다. 그 붉은 꽃이 환하게 거리를 밝히면 여름이 왔다는 걸 실감한다.

햇빛이 강해지고 더위가 심해질수록 꽃의 색깔은 더욱 짙어지고 `뜨거운 것이 좋아` 여름 찬가를 부르듯이 무성하게 피어나서 더위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옛날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한 전설이 있는걸 보면 우리나라 토종이 맞는 것 같은데 햇빛이 강해질수록 더 환하게 웃고 있는 꽃을 보면 어느 뜨거운 행성에서 지구로 날아온 여름의 전령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무의 몸매가 특이하고 만지면 잎들이 간지럼 타듯이 흔들린다고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한단다. 자미화라고도 불리는 꽃은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한다는 예쁜 꽃말을 갖고 있다. 행복, 소망 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꽃말처럼 코로나가 얼른 끝나길 소망해 본다.

여름날 무성하게 피는 꽃을 보고 있으면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난다. 무명수건 아래 땀을 흘리며 일하시던 어머니, 붉은 꽃송이들이 땀에 젖어 있는 것만 같다.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콩밭 매는 어머니 얼굴이 땀에 흠뻑 젖었다. 내리쬐는 땡볕은 뜨겁고 밭고랑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숨이 막히지만,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 탁 탁하고 콩이 튀는 타작마당을 생각하고 식구들 입에 들어갈 고소한 콩국을 생각하며 연신 흘러내리는 땀에 무명수건을 적신다. 부지런히 호미질 하지만 긴 밭고랑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물 주전자를 들고 냇물을 건너는 나의 등도 땀이 흥건하게 젖고, 콩밭으로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저만치 어머니 흰 수건이 보였다. 엄마! 하고 크게 부르며 달려갔다.

뒤돌아보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 땀에 젖고 더위에 익어 붉게 물들어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여름이 오고 콩밭에는 잡초가 우거졌지만 호밋자루 놓으시고 먼 길 가신 어머니는 배롱나무 꽃 속에서 웃고만 계신다.

폭염 속에서 더 빛나는 저 꽃은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살아오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땀이 밴 얼굴이다.

폭염에 지쳐 느슨해진 나를 뒤돌아본다. 나도 저 꽃처럼 당당하게 더위에 맞서며 용감하게 이 여름을 지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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