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23:27 (금)
가야불교의 시작 장유화상
가야불교의 시작 장유화상
  • 도명 스님
  • 승인 2021.08.16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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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역사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땅에도 세월의 나이테인 땅의 역사가 있으며 또 땅에 이름을 붙여 지명화(地名化)되면 그것도 시작, 과정, 현재라는 역사를 가진다.

김해에는 `장유`라는 지명이 있고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는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는 스님의 이름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때 `화상`이란 덕이 높은 스님을 말하는 용어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장유화상은 허왕후의 오빠로 인도 아유타국 왕자 출신의 스님이며 두 남매는 가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 주었다.

1915년 숭선전 참봉 허렴이 찬한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에는 "화상이 놀았다 하여 절도 장유, 산도 장유, 마을도 장유다"라고 했다. 이처럼 현재도 장유는 지역 이름뿐 아니라 장유사(長遊寺)라는 사찰명에도 남아있으며, 지금은 이름이 달라졌지만 장유산(長遊山)도 조선 시대까지는 실재했다. 그리고 1708년 증원 스님이 찬한 <김해 명월사사적비>에는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받들어 옴에 왕이 불도를 중히 여겨 숭불하게 된 것을 다시 증험하게 하는 바이다" 이어 "화상의 성은 허씨요, 이름은 보옥이며 아유타국 임금의 아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 1797년의 김해 은하사 <취운루중수기>에도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가락국의 왕비 허왕후가 천축국에서 올 때 오빠 장유화상이 함께 왔다고 한다. 천축국은 본래 부처의 나라이기에 왕이 은하사와 명월사 및 암자를 창건하라고 명하며 부암, 모암, 자암이라 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을 보였는데 이는 왕후의 소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544년에 쓰여진 주세붕의 <장유사 중창기>에는 화상이 월지국 출신의 신승(神僧)으로 나온다. 이처럼 장유화상의 출신에 대해서는 서역, 아유타국, 천축국, 월지국 등의 다양한 기록과 주장들이 있지만, 이 모두가 옛사람들의 관념으로 본 인도를 지칭하는 말들이었다.

장유화상이 그 먼 곳 인도에서 순사를 각오하고 가야에 올 때는 세속의 사람들처럼 생존을 위한 호구지책으로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한 생을 걸만한 큰 목적이 있어서일 것이며 성직자로서 그의 사명은 진리의 전도와 이 땅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종교의 전도행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며 그 처음 전파자들은 생명까지도 걸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 일설에는 화상이 공주가 오기 전에 이미 상업 루트를 따라 먼저 와서 수행과 전법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으로 추측하건대 화상은 이 땅에 허왕후보다 먼저 와서 수로왕과 함께 가야의 융성과 불국토 건설을 구상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리따운 여동생을 수로왕과 인연 맺어준 것이리라. 왜냐하면 은하사, 동림사, 영구암. 흥부암 등의 장유화상과 인연 있는 사찰들은 모두가 나라의 번영을 위해 지어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가야 초기 화상의 역할은 부강하고 개방된 나라를 지향하는 수로왕의 자문이면서 때로는 도반과 같고 때로는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조카인 일곱 왕자가 출가한 것은 외삼촌인 장유화상의 수행력과 덕행을 평소에 사모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한두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이나 되는 왕자가 집단 출가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고 오랜 시간 속에서 상호 간에 충분한 신뢰가 쌓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말에 "인정이 농후하면 도심은 옅어진다"고 한 것처럼 화상은 칠왕자의 스승이 되고 난 후 외삼촌과 조카라는 혈육의 정을 멀리하고 수년간의 혹독한 훈도 끝에 지리산 칠불암에서 성도하게 하였다. 이후 칠왕자는 득도하여 승천한 것으로 회자되며 국내에서는 더 이상의 기록은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남큐슈 고쿠부(國分)와 가사사(笠沙) 지역에 가야의 칠 왕자에 대한 흔적과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점이다.

부산일보의 동경 지사장으로 오랫동안 일본에 근무했던 최성규 기자가 1993년에 20여 년간의 연구와 답사를 바탕으로 <일본 왕가의 뿌리는 가야왕족>이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남큐슈 지역에는 칠왕자 신사와 칠왕자 성(城) 그리고 7개의 김씨 마을이 있다고 하고 있다. 가야를 떠난 칠왕자는 도의 즐거움에 안주하지 않고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마음으로 미지의 땅인 일본 열도에 가서 개인의 안락보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중생들을 제도한 문명전파자들은 아닐까. 칠왕자의 일본 열도 진출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신세계를 개척한 어머니 허왕후의 모험 정신과 가야의 정신적 멘토인 외삼촌 장유화상의 자비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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