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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정립 위한 제언⑦ 깨어있는 시민 사학의 시대로
가야사 정립 위한 제언⑦ 깨어있는 시민 사학의 시대로
  • 도명 스님
  • 승인 2021.08.02 2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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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의 규명이고 그 다음은 그것을 해석하는 사관이다.

역사의 가치란 그것이 자국의 이익에 앞서 찬란했든 불행했든 있는 그대로를 규명하고, 해석과 평가를 통해 역사적 의의와 현재의 교훈을 도출해야 한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기록하는 자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기록하고 전승되어 후대에 진실로 드러나 역사적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수도인이 역사에 대해 이런저런 주제 넘은 소리를 하는 것은 진실이 부정당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며, 바둑과 장기를 두다 보면 실력이 부족한 훈수 두는 사람에게 간혹 묘수가 보이기도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대개 모든 조직에서 자체 정화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대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나 혁신가들은 굳건한 기득권 세력에 밀려나기 일쑤이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역사학계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보여진다. 일제의 학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학맥이 아직도 존재하며 `임나일본부는 사라졌어도 사신이 주둔하는 기관이 있었다`라든가 `무역하는 교역기관이 있었다` 등의 <변형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더러 있다.

가야의 건국 연대가 기원후 42년이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며, 일본서기나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끌어와서 가야의 건국을 300년대 전후로 잡는 실정이다. 물론 역사의 기록은 기록자의 관점에 의해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가야 건국은 여러 사료를 합리적으로 교차 검증하면 어느 기록이 진실인지 판명할 수 있는 사안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헌 기록뿐 아니라 현존하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무덤 등 기원 전후의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 이들 지역에서 전해오는 민담과 설화가 있는데 굳이 주변국의 사서를 끌어와서 혼란을 주는 학자들의 속내가 매우 궁금하다. 이럴 때 보면 가야사는 진실 규명을 위한 학문의 영역인지 아니면 이익을 다투는 정치의 영역인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식민사관에 전도된 학자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언론들이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 전시 때 주요 언론들은 역사를 왜곡하는 학자 편에 서서, 박물관이 가야 초기 기록을 삭제하고 가야의 역사 연대와 지도를 왜곡하여 임나사(任那史로)로 전시하는데 대해선 아무 말이 없었던 반면 파사석탑의 기원은 유사역사로 매도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국내 언론의 신뢰도가 왜 최하인지 알 수 있었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 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앞 기록들에 대해 평하여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평하여 말한다. 사기, 한서를 지음에는 조선을, 양월 동경시대에는 서강을 찬록하였다. 위나라 때부터 흉노가 마침내 쇠퇴하자 다시 오환, 선비가 나타났으며 동이에 미쳐서는 사신과 통역사를 통하여 일에 따라 기술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되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評曰 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羌 魏世匈奴遂衰 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 使譯時通記述隨事 豈常也哉) 이처럼 중국은 `겨우 사신과 통역사를 통하여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만 동이족인 우리나라를 역사를 기술하였으니 어찌 제대로인 역사서가 될 것인가?`라며 저자인 진수도 이웃 나라에 대한 역사 기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학계에선 이들 역사서보다 더 정밀한 우리 역사서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북한의 역사학계조차 가야가 서기 42년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가야가 건국 당시 확실한 고대국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 김해 구산동에 있는 350t 규모의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다. 가야는 기원 전에 이미 세계 최대의 고인돌을 조성할 정도의 거대한 세력들인 구간(九干)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북쪽에서 도래한 김수로가 왕으로 추대되면서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으로 칭하였고 함께 온 집단들은 나머지 5가야를 세워 6가야가 되었다. 520년을 이어온 가야의 찬란한 역사는 삼국의 역사와 함께 기억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이제 우리들은 일부 학자들의 사대주의적인 역사관에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우리 기록을 중심으로 가야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오는 8월 광복절은 나라를 되찾은 지 76년 되는 날이다. 한 나라의 진정한 광복은 영토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민정신까지 독립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 시대는 바야흐로 국민 스스로 자주적으로 깨어있는 시민사학(市民史學)의 시대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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