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5:55 (토)
유월의 들판에 서면
유월의 들판에 서면
  • 이은정
  • 승인 2021.06.24 2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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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수필가
이은정 수필가

유월의 들판에 서면 이제 막 뿌리를 내린 벼들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고 솟아오를 듯 온통 푸른 세상이다.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도 푸른색을 더하고 있다. 그 푸른 빛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하얀 꽃이 있으니 여백이 있는 공간이면 어디든지 꽃을 피우는 개망초다.

온통 푸르기만 한 들판에 하얀 꽃을 피우니 절로 눈길이 간다.

이제 누구도 개망초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지 수십 년, 먼 북아메리카의 고향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우리나라의 토지와 기후에 잘 맞아서 어엿한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꽃으로 불리기보다 국민 잡초로 푸대접을 받아 밭을 매는 아낙의 지청구를 들으며 호미 끝에 뽑혀 나가고, 풀 베는 남정네의 낫 끝에도 사정없이 잘려 나간다. 그래도 돌아서면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버려둔 묵정밭에 진을 치고 자라고 달맞이꽃 피는 길섶이나 논두렁 밭두렁에도 넉살 좋게 자리를 잡고 제 영역을 넓힌다. 눈길 닿는 곳마다 발길 스치는 곳마다 가까이 있으니 이웃사촌처럼 친근하기도 하다.

`망초 망초 개망초` 노래하듯 부르면 하얗게 웃고 일어나는 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면 작고 동그란 꽃 모양에 노란 속살이 흡사 계란 프라이를 연상하게 하는 앙증맞고 예쁜 꽃이다. 하얀 무명 수건을 쓴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풍기는 단내 같은, 그 달큼한 향기가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

이처럼 예쁜 꽃이 꽃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잡초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시대적 배경도 있겠지만 척박한 땅이라도 아무 곳에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생태적 습성 탓도 있을 것이다. 너무 흔하니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화해`라는 꽃말처럼 어깨동무하고 무리 지어 피는 개망초가 없다면 온통 푸른빛뿐인 초여름들판의 풍경이 조금 심심하지 않겠는가.

꽃을 대할 때 아름답다, 향기롭다는 느낌과 더불어 그 꽃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꽃을 더 사랑하게 되고 꽃의 품격이 더욱 높아지는 것 같다. 이른 봄에 피는 매화와 동백꽃, 6월의 장미와 능소화, 가을의 국화와 코스모스 등 제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꽃들에 우리는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정서적인 공감을 가지기도 한다. 개망초에도 그런 매력이 있다는 걸 느꼈던 때가 있었다.

2014년 4월에 비극적인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 국민적 애도의 물결이 강산을 덮었다. 날이 갈수록 비통함과 분노가 깊어가는 그해 6월에도 개망초는 피고, 산책길에서 바라본 꽃의 모습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얀 옷을 입은 무언의 항거, 동그랗고 노란 리본을 얼굴에 달고 "살려내라, 살려내라" 소리치는 들판 가득한 울음소리, 그 끝없는 슬픔을 위로하는 개망초의 곡비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렇게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순간 개망초도 소중한 꽃으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망할 놈의 개망초라고 놀리든 귀한 꽃이라고 치켜세우든 아랑곳하지 않고, 때가 되면 피고 지고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꽃에 인간의 잣대로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초여름의 한 풍경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 가치를 다 하니 감사할 뿐이다.

여름이 다가온다. 햇볕이 두터워 지니 들판은 온통 개망초 세상이다. 꽃향기를 쫓아서 벌 나비들이 잔치를 벌이고, 또 한 철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삶의 날들도 더위를 동반하고 서서히 다가온다. 쇠똥구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했는데 개망초가 주는 무언의 교훈을 생각하며 슬기롭게 여름을 맞이해야겠다. 주어진 나의 영토와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이 비록 가난하다고 해도 개망초처럼 밝은 얼굴로 살아가리라,

개망초 꽃이여! 잡초가 아닌 꽃의 이름으로 너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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