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3:22 (토)
부채의 역할
부채의 역할
  • 하태화
  • 승인 2021.06.22 2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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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화 수필가ㆍ사회복지사
하태화 수필가ㆍ사회복지사

우리말은 참 어렵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이니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뜻글자인 한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에 한 표를 던진다. 이렇게 말하면 영어는 소리글자임에도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말은 라틴어를 기원으로 하는 영어나 유럽어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 `부채의 역할`이라 제목을 써 놓고 보니 이 짧은 글만 봐서는 빚을 진다는 `負債(부채)`인지,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글의 주제와 다르고, 생각지도 않았던 한자 병기의 주장을 하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 얘길 하려고 한다. 부채는 자린고비 이야기에도 나온다. 손으로 부채를 잡고 흔들면 부채가 빨리 망가지니 부채는 가만히 잡고 고개를 흔들라는 이야기다. 사람과 부채는 서로 상대적이니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과학적인 원리만 뺀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재밌는 이야기다. 어릴 때, 모기장 바깥에서 부채를 부쳐주던 엄마가 생각난다. 사실 부채에서 나오는 바람의 힘으로는 모기장만 살짝 움직일 뿐, 모기장 안에 있는 나에게는 바람이 오지 않는데 그걸 모르는 엄마는 아들 사랑에 내가 잠들 때까지 모기장 바깥에서 부채질하고 있었다. 요즘은 더위를 이기기 위해 에어컨, 선풍기에 심지어 무풍까지 나오고 게다가 `손풍기`라 불리는 휴대용 선풍기까지 있는 시대라 부채가 설 곳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부채는 바람만을 일으키는 첨단 기계가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요즘의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 외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부채는 햇빛 가리개의 역할을 한다.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는 양산이나 모자 없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부채다. 필요할 때 항상 그늘을 제공하는 참 착한 녀석이다. 온몸을 가려주진 못하지만 크기와 비교하면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고마운 도구이다. 부채는 얼굴 가리개의 역할도 한다. 보기에 민망한 것은 자신의 눈을 가려 그 상황을 피해가고, 자신을 노출 시키고 싶지 않을 때는 부채로 자신의 모습을 가린다. 얼굴뿐만 아니라 가리고자 하는 부분을 가릴 수 있는, 가방이나 책으로 가리는 것보다 티 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얼마나 기특한 녀석인지 모른다.

요즘 부채는 홍보 역할을 한다. 여름철 길가에서 광고 전단지는 받지 않아도 광고가 들어있는 부채는 잘 받는다. 전단지 보다 원가가 좀 더 들긴 하지만 일회용이 아닌 여름 한 철을 가지고 다니면서 광고를 볼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전단지보다 비싸다고 할 수 없다. 부채는 장식, 액세서리의 역할도 한다. 큰 부채는 큰 대로 벽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액세서리로서 포인트를 준다. 민족 고유의, 한국의 미가 들어있는 부채 문양이라면 외국인의 선물로도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경주 같은 고도나 한국민속촌 같은 관광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선물 아이템이기도 하다.

우리의 멋을 자랑할 때 등장하는 부채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이다. 여러 개의 부채가 만드는 한국적인 곡선은 한국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고유의 외줄 타기에도 부채가 등장한다. 기다란 봉을 사용하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의 외줄 타기 공연에는 작은 부채를 사용한다. 이 부채는 때로는 펴고, 때로는 접어서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부채를 펴면 공기의 저항이 달라져 가볍고 짧은 부채라도 균형을 더 잘 잡게 해 준다. 어느 해 여름휴가 때, 전주 한옥마을 안내소에서 부채 하나를 집었었다. 한옥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어 안내판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양산, 손풍기, 지도를 드는 것보다 부채 하나로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참 똘똘한 녀석이었다.

요즘엔 대나무 살에 종이를 부친 부채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챗살은 물론이고 부채 전체가 플라스틱으로 된 것이 일반적이다. 경제 원리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매우 아쉽다. 담양에 가야만 대나무 부채를 볼 수 있는 것인지.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 작년에 사용했던 부채를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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