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2:11 (토)
가야사 정립 위한 제언① `반도사관` 극복해야
가야사 정립 위한 제언① `반도사관` 극복해야
  • 도명 스님
  • 승인 2021.06.21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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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정체성과 가치는 현재에 있지만 그 근원은 과거로부터 온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좋았던 과거를 잊지 못해 집착하고 또 어떤 이는 지우고 싶은 과거를 회피하거나 왜곡하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에도 발생하는데 특히 한, 중, 일 고대사 문제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역사 왜곡의 문제가 어느 정도라면 바라보는 시각차라고 이해하겠지만 상대가 계획적이고 반복적으로 왜곡하거나 침탈한다면 그것을 그냥 묵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고 호미를 막을 일을 나중에 포크레인으로 막을 일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고대사 해석을 놓고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이 전혀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그 대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단군을 부정하고 신화화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는 고조선 멸망 시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의 위치와 고조선의 강역 문제이다>.<세 번째는 고대 야마토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통치 기관을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들 모두는 별개의 문제 같지만 알고 보면 한ㆍ중ㆍ일 고대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제이며 이웃 나라의 식민 사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에 묶으려는 `반도사관`이 그 바탕이다.

다시 제대로 다뤄봐야 할 부분이지만 먼저 바른 가야사 정립을 위해 임나일본부와 가야의 건국연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보면 한쪽에서는 이미 정리가 끝난 문제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지금도 진행형이며 앞으로 심각한 일을 예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일곱 곳의 가야 고분군 중 합천의 다라국과 남원의 기문국 두 곳이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서 말하는 임나의 지명들로 등재되려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발생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의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는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야가 임나다, 임나는 김해 또는 고령이다 라는 모순되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다. 임나일본부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로 고대 야마토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였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때 정복했다는 곳이 임나 7국이라는 것인데, 앞으로는 임나일본부는 없다고 해놓고 뒤로는 임나 7국 임나 10국은 가야나 한반도 남쪽에 있다고 한다. 그럼 이런 논쟁 이전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 기록인 1차 사료에서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아보자. 서기 720년에 쓰였다는 일본의 역사서<일본서기>에는 서기 200년 중애(仲哀)천황이 죽고 난 후 여왕이 된 아내 신공(神功)왕후가 서기 249년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신라와 가야의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였으며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200여 년간 경영하였다는 기사가 그 근거이다. 과연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일까?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허구라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첫째 주갑제라는 역사 년도 계산법이다>. 일본 학자들도 신공왕후가 출전한 249년의 기록이 당시로써는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1주 갑을 60년으로 보는 주갑제(周甲制)라는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이상한 년도 법을 적용하여 249년의 기록을 2주 갑 즉 120년을 늘여서 서기 369년에서 562년 까지의 역사적 기록으로 조작하였다. 일이년도 아닌 120년을 늘인 것을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코미디이다. 둘째, 임나일본부에서의 일본이라는 국명은 4세기에는 없었다. 왜에서 일본이라는 국명으로 바뀐 자체가 서기 670년 이후인 7세기부터 비로소 처음 일본이라는 국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421년 이후에 생겨난 나라가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걸 믿는 짱구가 있을까 싶은데 일본 우익뿐 아니라 지금 일본의 중,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 가르치고 있다. <셋째 3, 4세기 야마토 왜는 철기가 없었다>. 전쟁에서 무기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다. 당시 왜는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할 수 없었고 6~7세기가 되었어야 한반도에서 제철 기술을 처음 도입하였다. 돌칼이 쇠칼을 이기고 어린아이가 어른 여럿을 이겼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런데 주류 사학계 다수의 학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기록한 일본서기를 `비판적 수용`이란 근사한 말을 하며 그 지명을 한반도에 확정하여 역사 왜곡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또 역사를 모르는 지자체장들은 그것을 비판 없이 수용하여 본의 아니게 역사 왜곡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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