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2:37 (토)
정의의 정의
정의의 정의
  • 이광수
  • 승인 2021.06.20 2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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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로스쿨>을 흥미롭게 시청했다. 극중 한국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생들이 ‘모의법정’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열띤 변론공방을 펼치는 것을 보고 로스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이 드라마의 사건발단과 전개과정에는 파렴치하고 부패한 정치인의 전형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대권몽의 마법에 걸린 고영수라는 정치인이 비참하게 몰락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만 사법정의에 대한 의문부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필자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시선이 자주 멈춘 곳은 이 정치인의 사무실 메인테이블 뒤편 벽면에 걸려 있는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는 액자였다. ‘뭐 눈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주역바라기인 필자는 이 액자내용의 의미를 알기에 드라마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결론까지 유추했다. 짐작대로 이 정치인은 대권야욕에 눈이 멀어 부정한 방법으로 각종비리를 저지르며 기고만장한다. 이처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패한 비리정치인에 맞서 의기투합한 로스쿨생과 지도교수는 주도면밀하게 법정투쟁에 임한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이 정치인은 ‘잠룡물용’의 함의를 무시한 채 경거망동한 결과 법의 심판을 받아 영어의 신세로 전락한다. 주역 중천건괘 초구(첫효)의 효사인 ‘잠룡물용’은 ‘물속에 잠겨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 또는 물속에 잠겨있는 용이니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다. 아직 능력부족이니 실력을 기르면서 수신제가하면 언제가 ‘비룡재천(飛龍在天)’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효사다. 따라서 만사에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계의 함의가 내재되어 있다. 드라마 속의 이 정치인은 이를 잘못 해석해 은인자중해야 함에도 마치 자신이 대권잠룡인양 과신해 금도를 어기다가 몰락을 자초한 것이다. 중천괘의 괘사는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크게 형통하다. 바르게 함이 이롭다’ 이다. 여기서 바르게 함이라는 정(貞)은 정(正)이다. (고사역은 占으로 해석). 주역 괘효사의 길한 판단사도 바르고 정의롭게 해야 이로움이 있지 불순한 이정(利貞)은 정길(貞吉)의 길운을 얻지 못한다.

흔히 우리는 일상사나 이익문제로 다툼이 생길 때 상대방과의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법대로 하라’고 한다. 물론 이럴 경우 이견해소는 물 건너가고 ‘법대로 하자’로 결론 난다. 결혼은 합의이혼이고, 이해관계는 송사로 끝난다. 여기서 과연 법(法)이란 정의롭기만 한지 의문스럽다. 드라마 속에서도 범죄를 저지를 사실이 있으리라는 의심은 가는데, 이게 ‘합리적 의심’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한다. 물론 이 말은 특정 성향의 지지자나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 의심에서 나왔으니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변명하는 것을 조롱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현재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만연되어 있는 불신풍조의 풍자다. 그들은 그럴듯한 근거를 들이대며 합리적 의심이라고 확신하면서, 마치 정신승리를 한 것처럼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골수좌파와 우파들이 자기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내로남불’로 표출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합리적 의심’의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공정과 정의는 법을 먹고 산다. 법 존재의 목적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확립에 있다. 그러나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드라마 로스쿨 도입부에 ‘TRUTH, JUSTICE BY LAW’가 뜬다. ‘법에 의한 진실과 정의’로 ‘법은 진실을 근거로 공정하고 정의롭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의 헌정사를 뒤돌아보면 법과 정치권력과 국민은 각각 따로 노는 ‘따로국밥’이었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는 다만 그 시대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정의되어 왔다. 어느 시기엔 정의였던 것이 어는 시기엔 불의가 되어 정의의 정의는 뒤집혀 졌다.

요즘 공정과 정의결핍증에 걸린 MZ세대들은 한방신드롬에 빠져 가상화폐와 주식에 올인하고 있다. 이것은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우리 사회에 기대할 희망이 없다는 징표다. 인생막장의 탈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한방에 보상받으려는 분노기제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로스쿨의 엔딩 멘트인 ‘정의롭지 않은 법은 가장 강력한 폭력이다’는 말은 바로 우리 사회가 처한 정의(正義)의 정의(定義)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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