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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사 초선대 <招仙臺>와 성주사 어수각<御水閣>
금선사 초선대 <招仙臺>와 성주사 어수각<御水閣>
  • 도명 스님
  • 승인 2021.06.07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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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사정담(山寺情談)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김해시 안동에는 금선사(金仙寺)라는 자그마한 암자가 있고 암자 옆으로는 바위들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작고 정겨운 그 동산의 이름을 `招仙臺`라 하는데 그것은 신선을 초대한 곳이란 뜻이며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칠점산(七點山)의 담시 선인을 초대하여 국가 운영의 고견을 듣기도 하였고 때로는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신선이 살았다는 칠점산은 지금은 모두 육지화되었지만 오래전에는 얕은 바다로서 작은 섬 일곱 개가 마치 점처럼 이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금선사 경내로 들어가면 우측에 7~8m가량의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며 가야 2대 거등왕의 모습이라고들 한다.

불상의 얼굴은 순수한 한국인의 모습은 아닌 듯하며 커다란 눈에 두툼한 입술을 하고 있고 양어깨 아래에는 국화꽃이 두 개씩 수놓아진 비단옷을 옷을 입고 있는데 양손은 옷 속으로 가려져 불상에서 나타나는 손의 모양인 수인(手印)이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마애불 아래 바위에는 60㎝ 정도의 커다란 발 모양이 움푹 패여 있는데 부처님의 발인 불족(佛足)이라 하고 있으며 불족은 연화대좌 등과 함께 불교의 대표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조은 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은 "초선대의 마애불과 족적은 인도 부다가야에 있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금강좌대 곁의 불상, 족적과 동일한 성격을 띤다. 서역 불교가 가락국에 최초로 들어와 제2의 불교를 탄생시켰다는 의미에서 조성된 유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뒤쪽 언덕에 올라가면 거등왕이 신선과 함께 앉았다는 연화석과 바둑을 두었다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지금은 `사모정`이란 정자가 오는 사람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초선대는 조선 중기까지는 초현대(招賢臺)로도 불렸는데 `신선`과 `현인`이 유사한 의미로 통용됐기 때문이다.

가야불교의 전설이 전해오는 초선대 마애불은 지금 공해와 산성비 등으로 인하여 전보다 많이 희미해져 가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으며 후대를 위해 보존이 시급해 보인다.

성주사(聖住寺) - 칠왕자 출가하다 창원의 불모산 아래에 있는 성주사는 신라 시대인 835년 무염 국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임란 때 전소된 후 진경 스님이 다시 중건할 때 곰이 불사를 도왔다 해서 일명 `곰절`로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창건 설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신라 시대 창건 이전 가락국의 장유화상이 이곳에 토굴을 지어 수행하면서 조카인 칠 왕자를 출가시킨 곳이 성주사라 한다. 가야불교에서 성인 성(聖)자가 들어가는 절 이름이 몇 있는데 수로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성조암(聖祖庵)과 장유화상과 칠 왕자가 함께 수도했다는 팔성암(八聖庵)이 있다. <가락국기>에도 수로왕이 신답평에 임시 궁궐터를 정할 때 말하기를 "칠성(七聖)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니"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가락국에서 쓰인 성(聖)자의 의미도 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다.

성주사에서 출가한 칠 왕자는 합천 가야산으로 가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지리산 운상원으로 가서 2년간의 수행 끝에 도를 이루었다 한다.

개인적으로 칠 왕자에 대한 이미지는 수로왕과 허왕후라는 좋은 부모 만나서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성장하여 외삼촌인 장유화상이라는 훌륭한 스승 아래서 고생하지도 않고 도를 이룬 것으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근원적 이치와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데는 결코 요행이나 지름길은 없었고 늘 묵묵히 지기 수행에 따른 인과를 믿고서 진실되게 매일매일 실천하는 길만 있을 뿐이라 느껴진다.

칠 왕자의 득도(得道) 과정을 살펴봐도 예외가 없었으며 한번 만에 쉽게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4전 5기의 뼈를 깎는 수행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가한 칠 왕자가 성주사에서 처음 수도할 때 자식이 보고 싶었던 수로왕 내외가 가끔 찾아왔었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처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이 성주사 `어수각`(御水閣) 샘물이다. 대개 왕의 명령을 어명(御命)이라 하듯이 김수로왕 부부가 물을 마신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올해 초 성주사에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수각 샘물을 마셨는데 그 물은 이 천년 세월에도 마르지 않고 지금도 청량한 물맛을 내고 있으며 가야불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의 역사인 민담과 설화 속에서도 면면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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