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1:43 (금)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 - 해동초조<海東初祖> 장유화상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 - 해동초조<海東初祖> 장유화상
  • 도명 스님
  • 승인 2021.05.17 2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 스님 산 사 정 담(山寺情談)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치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 희소하냐, 또는 최초이냐 즉 원조이냐 등일 것이다.

그래서 먹는 곰탕에서부터 첨단 기술에까지 원조 논쟁은 끊이지 않으며 역사와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원조가 가진 상징성과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은 일찍이 인식하였던 때문이다. 한국 불교에서도 우리나라 불교 최초 전래자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가야불교 최초 전래자인 장유화상에 관한 것이다. 김해 장유의 맑은 물이 흐르는 대청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산뜻한 느낌의 도량이 나타나는데 불모산 용지봉 아래에 있는 가야불교 연기사찰 장유사이다.

장유사라는 사명(寺名)은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는 스님의 이름에서 왔다고 하며 이때 `화상`이란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장유화상은 수로왕에게 시집온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오빠라고 전하니 스님은 아유타국 출신의 왕자이며 수로왕의 손위 처남이 되기도 한다.

100여 년 전의 기록인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에 보면 "화상이 놀았다 하여 절도 장유, 산도 장유, 마을도 역시 장유라"라고 한 것을 보면 절 이름, 산 이름, 마을 이름, 이 모두가 장유화상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락국기>에 보면 가야 8대 질지왕이 수로왕과 허왕후가 초야를 치른 곳에 서기 452년 왕후사를 지었고, 그 후 500여 년이 지난 952년경의 고려 광종대에 장유사를 지었다 하니 장유사의 역사는 천년을 조금 넘는다 하겠다. 또 다른 기록은 1554년 주세붕의 <장유사 중창기>인데 거기에서는 신라 애장왕대 (800~809)에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락국기`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가락국 질지왕이 시조 할머니 허왕후를 위해 왕후사를 지을 적에 논 10결을 주는 데 반하여 수 백 년 후 나라에서 장유화상을 위한 장유사를 지을 적에는 왕후사가 하사받은 10결의 30배인 300결의 논과 산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가야 시대에는 파사석탑을 싣고 온 허왕후를 해동 불교의 첫 전래자로 본 반면에 통일 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허왕후라는 재가 불자가 아닌 장유화상이라는 스님을 해동 불교의 첫 전래자로 인식하고 국가적인 불사와 지원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후대에 새로 지어진 장유사가 본사가 되고 전통이 있는 왕후사는 말사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장유사에서 왕후사를 폐사까지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해동 불교 최초 전래자에 대한 상징이동이 일어났음을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다.

<장유사 중창기>에는 스님의 출신을 `월지국`으로 말하고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는 서역 `아유타국`이라 하며 은하사의< 취운루 중수기>에는 `천축국`이라 하였다.

<숭선전비>에서도 가까운 주위의 나라가 아닌 먼 나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의 인식으로는 모두 인도로 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때에도 인도는 먼 나라였지만 `먼 거리와 고대라는 시간적 제약`이 교류의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우스갯소리로 "발 달린 짐승이 어디를 못 가나"하듯 인간은 생존과 필요에 따른 목적이 있으면 달나라도 가지 않았던가 말이다. 법당 뒤로 조금 올라가면 장유화상 사리탑이 나오는데 사리탑의 조성연대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시대인 것은 스님이 열반한 가야시대 당시에 사리탑을 모셨으나 세월의 풍상에 의해 탑이 모손되어 후대에 다시 모셨기 때문이리라. 법당 마당에서 아래로 60여 미터 내려가면 장유화상의 수행 토굴터가 나오며 큼직한 돌 축대 위에 지금은 자그마한 흙집을 지어놨고 여기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시 공부를 하였던 곳이라 한다. 생각해보면 장유화상은 허왕후보다 이 땅에 미리 와서 은하사, 영구암, 장유사 등지에서 수도하였고 수로왕과 여동생을 중매하였다. 그리고 칠 왕자를 출가 시켜 그들을 도통하게 했으니 조카들을 부처로 만든 스승, 즉 불모(佛母)였고 이후 산 이름도 자연스럽게 불모산이 되었으리라. 장유화상의 설화와 전설은 김해와 하동 등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그가 가야시대 초기 이 땅에 왔다면 한국 불교의 역사는 새로 써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왕자인 장유화상과 공주인 허황후, 그들보다 300여 년 앞서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인도 아쇼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와 딸인 상가미타처럼 그들도 한국 불교 최초 전래자의 지위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