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9:36 (금)
파사석탑의 진정한 가치
파사석탑의 진정한 가치
  • 도명 스님
  • 승인 2021.03.22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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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김해 구산동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허왕후릉이 있고 그 옆 파사각 안에는 인도 아유타국 출신의 공주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함께 왔다는 파사석탑이 있다.

파사석탑의 유래에 대한 최초 기록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권3 탑상편의 <김해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있으며 거기에는 탑의 유래를 육하원칙에 의해 명확히 말하고 있다.

파사석탑의 명칭에서 `파`는 노파 婆, `사`는 춤출 娑의 한자를 쓰는데 탑이라는 신성한 종교 상징물에는 걸맞지 않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파사는 한자에서 뜻을 가져온 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의 `북극성`을 뜻하는 `파사`에서 음을 빌려 생겨난 명칭이기 때문이다.

가야와 가야불교를 말할 때 늘 하는 말이 기록과 유물이 부족하다고 하고 있지만 그나마 현물로 남아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유물인 파사석탑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부족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사석탑은 가야문화의 중요한 물증이라 말하면서도 학계나 불교계 김해시가 아직 제대로 된 연구조차 못 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파사석탑의 중요성에 비해 사실 규명을 위한 실행은 상대적으로 많이 소홀히 했다고 보인다.

파사석탑에 대한 연구는 80년대 후반 향토 사학자인 허명철 박사가 탑을 해체 연구한 이래 특별히 진전된 연구는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 학계의 활발한 연구를 바라본다.

허명철 박사 이후로 연구가 안 된 것은 아니지만 혹자는 처음 파사석탑이 올 때 탑이 아닌 평형석(ballast)으로 와서 이후 탑으로 조성했을 가능성과 탑의 문양으로 보아 탑의 조성이 14세기 원나라 건축물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등으로 말해 오히려 혼선만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분명히 `탑`이라 했고 그때 이미 "그 조각은 매우 기이하다"라고 했기에 탑의 문양은 원래 있었던 것이지 후대에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가야와 가야불교에 대해 제가 느끼는 의아스러운 부분 중 하나는 많은 연구자들이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가락국기>나 <파사석탑조>라는 1차 사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신뢰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는 점이다.

물론 치우치지 않는 냉정한 `사료 비판`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나 먼저 1차 사료를 면밀히 살펴본 후 규명 안 된 부족분은 합리적인 추측과 가설로 보완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항상 기록을 우선으로 하고 각자의 추측과 가설은 부수적으로 해야 하리라 본다.

우리는 100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정확한 검증이 쉽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하물며 2000년 전 고대의 사실 규명은 자연적인 세월의 흐름에 의한 모손과 병화 그리고 정치적 상황 등으로 원형 그대로 온전히 보존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그런 난관 속에서 전승된 사료들은 소설이 아닌 이상 신뢰를 저변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파사석탑은 많은 오해와 무시를 받아 왔는데 지난 1998년 동아대 박물관에서 발행한 <김해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의 파사석탑 편을 보면 "이 탑은 석재를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쌓은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무속인들이 무속 행위를 하기 위해 모아 놓은 돌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서 흔히 나는 돌이다" 등으로 본래의 기록과 무관한 억측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2019년 말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연구 결과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란 결과가 나왔고 적어도 "이 땅에 나는 돌이 아니다"라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해 그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

사실 파사석탑의 정확한 원산지는 앞으로 정밀한 성분분석을 통하여 규명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기원후 48년 허황옥이란 여인과 함께 왔다는 것이고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지방에는 이 돌이 난다는 사실이다.

보통 문화재는 지방 문화재인 문화재자료와 문화재 그리고 국가 문화재인 보물과 국보의 순으로 문화재의 가치와 위치가 정해지며 파사석탑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돼 있는데 이 탑의 역사적 가치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한 대접으로 보인다.

파사석탑은 이 천년이라는 탑의 역사성과 김해의 정체성인 가야의 시조 중 한 사람인 허왕후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사실성과 유일한 모양이라는 독창성에 비추어 보면 국보로 되어도 넘치지 않거늘 가장 아래 단계인 문화재 자료는 좀 아니다 싶은 마음이다.

백번 양보해 13C 고려 시대 탑이라 해도 최소 보물급은 되지 않겠는가.

어디 눈 밝은 사람은 알리라.

사실 뭉뚱그려진 저 돌무더기가 현존하는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불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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