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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에 나타난 가야불교의 흔적
가락국기에 나타난 가야불교의 흔적
  • 도명스님
  • 승인 2021.03.08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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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가야나 가야불교를 논할 때 기록이 부족해서 고증하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늘 듣게 된다. 물론 고대의 기록들이 부족한 이유 중에는 수많은 외침으로 인한 병화 이외에도 국가의 어떤 상황이나 정세에 의해서 나라에서 책을 거두어가서 폐기하는 수서령(收書令)이란 제도도 원인이 있다.

국가든 개인이든 힘이 없게 되면 강한 상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도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에 종속되었던 시기에는 상대의 강압에 의해서 또는 우리 스스로가 굴종하여 못나게도 우리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기까지 했었다.

그리하여 가야도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신라에 병합된 이후로 역사에서는 삼국과의 분쟁이나 특이한 사건들이 있을 때만 부가적으로 끼워서 가야를 서술하였다.

그나마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나 `파사석탑조`라도 남아 있어서 가야와 가야불교의 근원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비교적 후대의 기록이나 그 흔적들은 여러 곳에 남아있다. <장유사중창기>, <숭선전지>, <은하사 취운루중수기>, <왕산사기>, <김해명월사 사적비>, <가락국사 장유화상기적비>, <가락국 태조릉숭선전비>, <부인당 유주비> 등의 문헌과 비각에 가야불교의 기록들이 전해온다.

다음의 기록들은 문헌과 비각의 전문을 부분 요약하여 발췌한 것임을 주지하시길 바라며 먼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기록들부터 살펴보면,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가락국기駕洛國記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다. 그러나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을 머물게 할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어 칠성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니"]. ["둘레 1천 5백 보 규모의 외성(外城)을 쌓을 곳과 궁궐 및 전우(殿宇)와 이에 따른 제 관리의 청사와 무기고 및 곳간 지을 터를 정하시고 환궁하셨다"]. ["이에 원가 29년 임진년(452)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왕후사라 하고 사신을 보내어 근처의 논 10결을 측량해서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로부터 이 절이 생긴 지 5백 년 후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이렇게 가락국기에서는 초기불교에서 최고의 성자로 알려져 있는 16나한과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 일곱 부처(七佛)를 지칭하는 단어인 칠성(七聖)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초기불교에도 나오는 나한이란 용어가 혹자는 7세기 정도나 되어야 중국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기록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데, 이는 가야불교는 중국 대륙을 통해 전래된 불교가 아니라 바다인 해양으로 직접 전래됐다는 사실을 간과한 말이다.

그리고 전우(殿宇)라는 용어는 사전에 보면 `신이나 부처를 모신 사당`으로 나오고 있는데 수로왕이 도읍을 정할 때 외성 안에 신이나 부처를 모실 당우를 지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면 수로왕은 건국 초기부터 이미 불교를 알았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 2019년 외성 안의 회현동 동사무소 옆 주택지에서 전우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가로, 세로 10m의 건물터가 나왔고 처음 언론에서는 가야 시대의 첫 목탑 유적으로 추정된다고 관심이 집중되었다.

가로 10m 기초 위에 20m 높이의 건물로 추정되었기에 그런 건물이라면 목탑이 유력하다고 발표했으나 발굴조사의 최종결과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다`였다.

그 이유가 보통 탑 중앙에 있는 주심, 주초심(柱礎心)이 없기에 탑으로 보기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 용도가 `알 수 없음`이라고 했다는 학계 해석에 아쉬움이 남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가야 시대에 최초로 불교가 들어왔고 이후 목탑도 세워졌다면 처음부터 완전한 구조의 목탑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탑의 구조도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생겨난 주초심이 `목탑이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학계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서기 452년에 가야 8대 질지왕이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곳에 왕후사라는 사찰을 세웠고 500년 이후인 통일신라 시대에 장유사가 지어졌다고 하고 있는데, 최근 장유사 아래 계곡에서 장유사 옛터로 보이는 유적지를 발굴조사 한다고 하니 땅속에 묻혀있던 옛 흔적들이 다시 소환되기를 기대해 본다.

가야불교의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있는 기록과 유적이라도 제대로 잘 살피면 역사는 분명히 대답을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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