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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김해의 별미로 무얼 먹었을까?
200년 전 김해의 별미로 무얼 먹었을까?
  • 김영복
  • 승인 2020.01.06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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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200년 전 김해의 별미는 조선 시대 사대부 시인 중 한 명인 이학규(李學逵, 1770년∼1835년) 선생의 1809년 김해의 풍물과 토속을 읊은 악부시(樂府詩) `금관죽지사(金冠竹枝詞)`와 1819년에 쓴 7언절구, 77수인 `금관세시기(金冠歲時記)`,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1801년(순조 1) 신유옥사(辛酉獄事)에서 천주교도로 몰려 32세에 김해에서 24년간 유배 생활을 한 후 1824년(순조 24) 4월에 아들의 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김해 지방을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들 및 중인층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 김해 지역의 문화 의식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며, 만년에는 처족 8촌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신위(申緯) 등과 교유하다 여생을 마쳤다.

 이학규 선생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김해 지역의 풍토(風土) 잡사(雜事)를 악부시(樂府詩)로 엮어냈다.

 이학규 선생이 김해 생활을 시작했을 때 김해는 이미 상업적 생활 방식이 상당히 진척돼 있었다. 향시(鄕市)가 활성화돼 있어 화폐가 일상을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양에서 내려온 선비가 김해지역의 거칠고 투박한 사투리에 대한 이질감과 심적 고통이 심했던 것 같다. 7년 동안 들은 사투리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飢鴉樹上百般鳴(기아수상백반명)

 주린 까마귀 나무 끝에서 백반으로 우짖는데

 觸撥閒懷自不平(축발문회백불평)

그 때문에 일어난 회한 어쩔 수 없네

 七載厭聽南土語(칠재염청남토어)

 칠년동안 들은 사투리 지긋지긋하기만 했는데

 此禽猶是故園聲(차금유시고원성)

 이 새소리는 여전히 옛 마당에서 듣던 것과 같구나

 김해에 온 이학규 선생에게 말투 못지않게 이질감을 조장한 것이 음식이었다.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 중 142 남식행(南食行) 김해 지방의 독특한 해산물들을 소개하면서도 그것을 먹는 방식과 습관에 대한 낯선 느낌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嶺南右海風土殊(영남우해풍토수)

 영남 바닷가 풍토가 달라

 嶺南食物旴怪乎(영남식물우괴호)

 영남 사람 먹는 게 괴상하구나

 ?肌?割猶??(동기련할유도구)

 살 도려낸 가물치는 아직도 펄떡이네

 其餘細鎖不任呼(기여세쇄불임호)

 나머지 자잘한 것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데

 一一鼎味克疱廚(일일정미극포주)

 부엌에서 한 맛 한 맛 끝이 없구나

 雖和鹽?雜薑葫(유화염시잡강호)

 소금 된장에다 마늘 생강도 섞었지마는

 象箸欲下仍??(상저욕하잉지주)

 젓가락 가져가다 우물쭈물하네

 서울에서는 익히 접하지 못했던 물고기, 조개, 게 등을 김해 사람들은 아주 맛있게 먹어대는데, 그 익히지 않은 회(?)의 비린내를 견디지 못해 기꺼이 수저를 가져가지 못하는 서울 사람의 머뭇거림을 그대로 시(詩)로 나타냈다.

 특히 `금관죽지사`와 `금관세시기`에는 김해 별미로 승가기학, 닭고기 국ㆍ갈대밭의 게[노해(蘆蟹)], 남포 고기잡이, 굴조개, 오아포(烏鴉浦) 청어 등이 기록돼 있다.

 이학규는 부자들이 승가기학을 좋아했다고 적으며 `좋은 술 강물 같고 국은 승가기`라 했고 `也喫東萊勝歌妓 一時佳味未應兼(야끽동래승가지일시가미미응겸) 동래 승가기 국 먹어보니 이리 좋은 맛 찾기 어렵겠네`라고 적었다.

 한편 당시 김해에는 술을 많이 마셔 몇 말을 마시는 술고래도 있었고 대식가도 많아 돼지 한 마리를 다 먹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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