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7:00 (토)
밀양출신 독립투사 김원봉 이념 편 가르기 지양해야
밀양출신 독립투사 김원봉 이념 편 가르기 지양해야
  • 김용구 기자
  • 승인 2019.11.12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부 차장 김용구
사회부 차장 김용구

의열단 단장으로 목숨걸고 독립 투쟁
해방 후 북한 건국 돕고 6ㆍ25 참여
이중잣대 버리고 독립운동가로 평가

 지난 10일 밀양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면서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선생의 서훈 논란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특히 이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이 눈길을 끌었다. 이 행사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이 주관했으며, 국가보훈처는 물론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의회, 강동구청 등이 후원했다. 이처럼 정부가 행사를 주관하지는 않았지만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등이 직접 참석해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나 이날 행사장 인근에서는 기념회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자유대한호국단 등 4개 보수단체가 의열단장으로 활동한 약산 김원봉 선생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인물`이라고 규정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이날 김원봉 선생을 `해방 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고, 북한에서 최고위직을 지냈으며 6ㆍ25 남침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고 표현하면서 `원조 빨갱이를 왜 기려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논란에 앞서 김원봉 선생의 과오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이 결성됐다. 의열단은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 죽여야 할 일곱 대상을 `7가살`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각 경찰서 등 다섯 가지 파괴 대상을 `5파괴`로 정하고 활동했다. 이들은 이런 지침대로 1929년 해단하기까지 10년 동안 34건에 달하는 의거 활동을 벌였다.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서,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서, 1921년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서, 1923년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서, 1924년 김지섭이 일본 왕국에서, 1926년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 등을 투척했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단원이 자결하고 수감됐으며, 행적조차 알 수 없는 단원도 상당수다. 이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보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일본은 김원봉 선생에게 엄청난 금액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이처럼 의열단의 활동은 목숨을 건 치열한 독립운동이었지만 6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김원봉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교과서에서 김원봉 선생이나 의열단에 대한 부분은 빠졌다. 이 때문에 아버지 세대들은 이들의 활동에 관해 공부해본 적이 없다. 우리도 최근 영화 `밀정`이나 `암살`을 통해 겨우 접했을 뿐이다.

 밀양 출신인 김원봉 선생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김원봉은 고향이 있는 남한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친일파 노덕술은 이념 문제를 들어 김원봉 선생을 고문했다. 남한에 실망한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 운동 당시 김구 선생 등을 따라 북한에 올라가지만, 남한에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김구 선생이 그 이유를 묻자 남한은 치가 떨린다고 했을 정도다. 이후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북한 건국을 주도했고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 장교가 돼서 남침하기도 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것은 김원봉 선생에 대한 이런 행적이 정치적 이념에 밀려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북한 장교로 활동한 김원봉 선생의 서훈 문제는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중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황장엽은 북한 주민들을 `주체사상의 포로`로 만든 최악의 사상범이지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바 있다.

 김원봉 선생이 서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방 이후 북한에서 벌인 활동 때문에 그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했던 독립운동이 평가절하당하지 말아야 한다. 이념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편 가르기 일뿐이다. 이제는 사회주의자 김원봉이 아닌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