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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먹함 남긴 독립운동가 윤현진 코러컬 공연
먹먹함 남긴 독립운동가 윤현진 코러컬 공연
  • 김중걸
  • 승인 2019.07.15 1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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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장/부산취재본부장 김중걸

 공연 내내 불편하고 먹먹했다. 짧은 장마 끝에 흐리게 갠 날씨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양산 출신이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 차장(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한 항일독립운동가 `아름다운 청년 우산 윤현진 선생`의 항일 독립활동을 담은 코러컬(합창과 뮤지컬 혼합형)을 지난 11일 밤 양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만났다. 설렘과 기쁨은 공연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우산 선생은 물론 의병장 서병희 등 지역의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 선열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가슴 속에 차오르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아름다운 청년 우산 윤현진` 코러컬 공연을 기획하고 직접 대본을 쓴 양산시립합창단 김재복 지휘자와 대본에 곡을 입힌 천득우 작곡가, 합창단을 총괄한 윤현경 단무장, 이은실 반주자 그리고 이들의 지휘를 헌신적으로 따르며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재조명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작품을 소화하고 공연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합창단원둘의 노고와 호국보훈의 마음에 박수와 갈채,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역 항일독립운동가 발굴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처럼 단숨에 우산 선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소환해 양산시민들에게 소개한 양산시립합창단의 열정에 양산민으로써 부끄럽기까지 했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 기획된 우산 윤현진 선생의 공연은 50분에서 100분가량으로 공연 시간이 배 이상 늘어난 만큼 선생의 항일투쟁사 등 선생의 일대기가 한편의 대서사시처럼 펼쳐져 관객들에게 나라 사랑 정신 고취는 물론 전율과 감동을 선물했다.

 극 중에서는 통도사 스님과 양산민들의 항일독립 의지와 활약상을 담아냈다. 통도사 구하스님 등 스님들이 주축이 된 영남권 최초 3.1만세운동으로 알려진 하북면 신평장터 대한독립 만세 운동 등 양산지역 항일독립 운동사를 소개해 양산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의미 있는 공연이 됐다.

 극 중에서 양산 출신 친일 형사가 같은 양산 출신 항일독립운동가인 윤현진 선생을 추적하고 압박하는 장면이 담겨 있는 등 극중 구성과 전개, 절정 등을 효과적으로 장치했다.

 특히 친일파 조선총독부 일본 형사는 노비 출신으로 설정해 만석꾼 출신의 30만 원(현재가치 300억 원)을 독립운동자금을 낸 항일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과는 대립적 상징적 구도로 설정하는 등 민족적 비극을 적절히 가미하는 방법으로 극 중 긴장도를 높였다.

 이 같은 민족적 비극적 설정은 양산의 과거와 현실을 투영한 것 같아 암담하기까지 했다. 양산은 이징옥 장군 등 조선 시대 삼장수의 고향이자 신라 만고 충신 박제상 공의 고향이다. 옛부터 충과 효가 넘치는 고장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양산이 산업화 바람으로 동남권 중심거점지역으로 발돋움하면서 지역 정체성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지역의 한 원로 교육자는 "일경의 끄나풀 활동으로 과거 양산에서 독립운동은 할 수 없었다. 이징옥 장군 사후 이 장군의 세력을 감시하는 수양대군 일파의 첩자 활동 역사를 시작으로 양산의 우울한 역사가 시작됐다"는 얘기가 되새겨지면서 주체성 상실 양산에 안타까웠다.

 올해는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년이다. 우산 윤현진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 활동 사료발굴에 지역정치권은 물론 지역사회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지난날 양산은 이원수 선생, 삼장수, 박제상 공 등 지역 인물을 상징화했으나 늘 결과는 용두사미 격이다. 탄탄한 이론적 근거마련 부족에 따른 예상된 결과이다.

 향토사학자 등 전문ㆍ비전문 연구자 발굴과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지역민들은 지역 역사 찾를 위해 향토사학자 등 연구자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우산 선생처럼 사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쾌적한 것처럼 양산 역사 찾기를 위한 제2의 독립 자금책이 돼 역사 연구자를 조력해야 한다.

 국가도 지역사 발굴에 지원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역의 역사가 모이면 국가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우산 선생은 1921년 9월 17일 30살의 나이에 상해에서 병으로 요절하면서 임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안창호, 김구, 여운형 선생 등과는 달리 평전 등 제대로 알려진 사료가 없다.

 윤 열사는 일본 동경 명치대 법과 유학 시절 조선 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항일투쟁을 하고 귀국 후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양산에서 의춘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다.

우산은 죽기 전에 "조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내 유골을 고향의 선산에 묻지 말며 내 자녀를 결혼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제의 조일 신문은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아래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할 만큼 선생의 위치는 뚜렷했다.

 우산 선생의 시즌 3 공연에는 풍성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태준, 이육사. 윤동주 선생과 같은 철학과 사상 등이 담긴 진일보된 선생의 항일 독립투쟁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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