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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기회의 땅 ‘나라싱해서 김민재로 다시 태어났죠’
한국은 기회의 땅 ‘나라싱해서 김민재로 다시 태어났죠’
  • 김정련 기자
  • 승인 2019.06.23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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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이주 외국인의 삶 <스리랑카인 나라싱해>
한국으로 귀화해 16년째 살고 있는 스리랑카인 나라싱해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좌우명을 새기며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으로 귀화해 16년째 살고 있는 스리랑카인 나라싱해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좌우명을 새기며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 통해 한국인 근면성에 관심 거제 중공업 산업연수생으로 3년간 근무

열악한 환경… 작업장 이탈 노동자 생겨 좋은 인연 만나 끝까지 근무할 수 있어

한국인과 결혼 스리랑카인이라 반대 심해 장인어른 살 집 제공해줘 신혼생활 해

슬로푸드, 실론티 문화 한국에 알리고 파 해마다 이주노동자 및 청소년 돕는 봉사

 2003년, 스리랑카에서 온 21살 청년 나라싱해는 거제도에 위치한 삼성중공업에서 산업연수생으로 3년간 지냈다. 그때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한국의 지역사회 개발 운동인 ‘새마을 운동’을 경제 성장의 표본으로 삼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한 재원들을 육성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일할 100여 명의 산업연수생들을 지원받았다. 나라싱해 또한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중소기업에서 일할 생각으로 한국으로 건너 온 일부 산업연수생들은 거대한 선박과 위험천만한 작업환경에 불안해하며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라싱해는 한국과 자신의 인연이 깊다고 설명하며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좋다고 말한다.

 16년이 지난 오늘, 한국으로 귀화한 나라싱해는 김민재라는 이름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새마을 운동’에 대해 배웠어요. 그때부터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부지런함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 뒤로도 삼보컴퓨터와 2002년 월드컵 등을 통해 꼬레아(Corea)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갖게 됐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코리아(Korea)로 알고 있지만 그때 우리는 한국을 꼬레아(Corea)라고 불렀죠.”

 △많은 산업연수생들이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끝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저 또한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작업장에 완전히 기가 눌렸죠. 대형크레인과 위험한 작업환경에 불안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슨 인복을 타고 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때 작업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욱이 더운 나라에서 온 나라싱해가 한국의 차디찬 겨울을 한 해 한 해 견뎌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3년의 계약 기간을 다 채우고 스리랑카로 돌아가려던 어느날, 길거리에서 한 남성이 나라싱해에게 말을 걸었다.

 “코란도를 탄 한 남자가 제게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한국어를 가르쳐줄테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좋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때부터 인연이 닿아 5년간 경북 구미에 위치한 한 IT회사에서 일했어요. 아직도 사모님을 엄마라고 불러요. 제게는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5년 간 함께 일하던 회사 측의 실수로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인 나라싱해는 그 후 사촌동생을 만나기 위해 김해로 내려왔다.

 △한국에서 힘든 일은 없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제게는 늘 좋은 사람들만 인연이 닿아 그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주변에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친구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김해에서 아는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그런데 제가 스리랑카인이라 반대가 심했죠. 시간이 지나고, 아내의 진심어린 고백에 결국 장인어른께서 두 손, 두 발 다 드셨어요. 그렇게 한국과 스리랑카에서 두 차례의 결혼식을 올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아내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장인어른과의 에피소드가 있나?

 “결혼 후 아내와 살 곳이 없었어요. 장인어른께서 살 곳을 마련해 줄 테니 살면서 1억을 갚으라고 하셨어요. 정말 열심히 갚았어요. 절반 정도 갚았을 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제 안 갚아도 된다고. ‘사위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며 ‘이제 너를 내 아들로 생각한다. 열심히 했으니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앞으로의 계획?

 “한국인들에게 실론티 문화를 알리고 싶어요. 빨리빨리 문화가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티문화보다는 커피문화가 익숙하잖아요. 하지만 최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슬로 푸드 운동이듯이 스리랑카의 실론티 문화를 한국에 전파하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얼마전에 스리랑카의 실론티와 예술 등 문화 전달을 위한 민간외교형 복합문화공간 ‘말리가’를 제주도에 개원했어요. 저는 스리랑카와 한국의 무역과 통역을 맡으며 좋은 품질의 티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한국에 들여올 수 있도록 하죠. 해외사업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실론티의 실론은 무엇을 뜻하는가?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의 스리랑카는 16세기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여러 유럽 국가의 지배를 받았어요. 실론은 스리랑카의 옛 국명이죠. 1948년 영국연방 자치령으로서 독립한 후 1972년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로 바꾸고 완전한 독립국이 됐어요. 스리랑카 국민들은 자신의 원래 나라 이름인 실론이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들이 생산하는 홍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홍차를 실론이라는 로고와 함께 품질을 인증하고 있어요.”

 나라싱해는 스리랑카에서 이제 막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무료로 한국어 수업을 지원해주며 그들이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스리랑카의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며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불교신자인 나라싱해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에게 수많은 선물을 줬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이 받은 수혜를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친구들에게 해마다 갚고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나라싱해의 좌우명이다.

 나라싱해와 1시간만 진솔한 대화를 나눠본다면 그가 한국에서 멋진 사업가로, 동업자로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긍정적인 사고와 끊임없는 노력이 현재의 나라싱해와 김민재를 만든 것은 아닐까. 나라싱해는 “비가 와서 질척거리던 땅은 마르고 나면 단단해져요. 이처럼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단련이 돼 더욱 더 단단해지죠”라며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고 싶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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