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때 붓과 운명적 만남… “서예는 나의 천직이죠”
10살때 붓과 운명적 만남… “서예는 나의 천직이죠”
  • 김정련 기자
  • 승인 2019.04.09 2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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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표 서예가 범지 박정식의 인생&작품세계
서예가 범지 박정식 선생이 청우마묵헌에서 일필휘지로 글을 쓰고 있다.
서예가 범지 박정식 선생이 청우마묵헌에서 일필휘지로 글을 쓰고 있다.

32세에 최연소 서예대전 수상 48년 외길 ‘청우마묵헌’ 후학 양성

수로왕 탄강설화 작품 시청 기증 “하루도 빠지지않고 감사하며 글 써”


 김해를 대표하는 서예가 범지 박정식은 신어산 북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상동면 묵방리에서 태어났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붓을 들고 먹을 간 그가 묵방리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로 웃고 넘기기에는 꽤나 운명론적이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1994년 그의 나이 32살에 한국 서예협회에서 주관한 서예대전 최연소 대상 수상자가 됐을 때, 그를 생각하는 모든 주변인들이 ‘이제는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냐’며 모두 서울로 떠나라고 했지만 그는 김해에 남기로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박정식은 교육청에서 주관한 자유 경시대회에서 동상을 받은 계기로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된다. 글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계속해서 글을 써보라는 선생님의 작은 제안이 훗날 김해를 대표하는 서예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때 동상을 받았던 작품이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던 율곡이 쓴 시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다.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시. 그때 썼던 글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던 박정식은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렸다. 석류 껍질 안에 부서져 있는 유리구슬. 세 살이었던 율곡의 눈에 비쳐 쓴 시가 꼬마 박정식의 첫 수상작이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미술부 회원이 되었던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회상하는 그는 각종 미술 대회에 나가 상은 늘 도맡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10살 때부터 붓을 잡아 올해 58세인 범지 선생은 48년 동안 한 우물만 판 셈이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은 한산의 시 오심사추월(吾心似秋月)이다. 한산자는 생평연도가 미상이지만 중국 당말경 청태산 국청사에 살았다고 짐작한다. 한산은 문수보살로 ‘한산집’ 등의 시집이나 설화가 유포돼 주로 선종회화의 화제가 되었다.

청우마묵헌을 나타내는 간판.
청우마묵헌을 나타내는 간판.

 오심사 추월(吾心似秋月) - 한산자(寒山子)

 吾心似秋月 오심사추월

 碧潭淸皎潔 벽담청교결

 無物堪比倫 무물감비륜

 敎我如何說 교아여하설

 내 마음 가을달 같아 푸른 연못처럼 맑고 깨끗하다 어떤 것으로 비교할 수 없으니 내가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나

 상은 곧 벌과 같다

 “좋은 글에는 누군가의 무르익은 인생과 경험이 녹아있습니다.” 대상을 받고 3년 정도 부담감에 붓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 범지 선생은 그때 당시 상은 나에게 짐이었고 벌이었다고 회상한다. ‘대상작가의 글이 형편없는데?’, ‘대상 수상작가의 글…’ 범지선생은 대상을 수상한 후에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에 사람들 앞에 서기도,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기도 두려웠다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던 중에 ‘상은 상일 뿐, 그 순간 나의 작품이 좋아서 뽑혔을 뿐이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서예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예대회가 올해 31회 째를 맞았다. 하지만 서예 대상 수상 작가로서 활동하는 사람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평범한 작가로 활동하면서 오히려 상을 받고 작가로서의 활동이 단절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이럴 때 상은 독과 같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고 했던가. 무게와 부담감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런 압박감과 무게감을 딛고 일어설 수 있으면 더 단단해 질 것이다. 범지 선생은 늘 본인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가지며 부단히 노력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서예의 전성기는 60~70살 즈음으로 본다. 어느 정도의 삶도 살아보고 또 수십 년간의 학습과정을 거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온다고 했다. 서예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문사철(文史哲) 이 3가지가 어우러져야 쓸 수 있다. 문사철은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보통 인문학이라고 분류되는 대표 학문들로 지성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교양을 의미한다. 손재주만으로 쓴 글은 언뜻 보기에 잘 쓴 글처럼 보일 순 있지만 감동을 줄 수는 없다. 범지 선생이 생각하는 좋은 글은 보면 볼수록 가슴에 울림을 주는 그런 글이다.

‘순자주수군민론(筍子舟水君民論)’ 47×120㎝, 한지에 먹, 2017 범지 박정식 작(作).
‘순자주수군민론(筍子舟水君民論)’ 47×120㎝, 한지에 먹, 2017 범지 박정식 작(作).

 청우마묵헌(晴雨磨墨軒), 365일 먹을 가는 집

 범지 선생이 서예를 가르치는 장소를 칭하는 말이다. 김해시 가락로 125번 길에 위치한 범지서화연구실은 연령제한 없이 누구나 붓을 잡을 수 있는 공간이다. 붓을 잡은 지 어언 40년이 다 돼가는 그도 감을 잃을까 두렵다고 한다. 붓을 놓고 있던 주말이나, 긴 연휴를 보내고 돌아올 때면 둔해진 기분이 들어 어김없이 청우마묵헌에서 붓을 잡는다. 범지 선생의 서화연구실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멍하니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수선화가 보일 때가 있다. 때로는 그런 수선화가 붓을 쥐게 하고, 때로는 책을 읽다 좋은 글귀가 그를 움직이게 한다. 나이가 들면서 눈도 침침해지고 둔해져 반짝이던 아이디어가 예전 같진 않지만 매일 붓을 잡아 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7~8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 제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볼 수 없어 많이 안타깝다는 그. 미술교과서에서 서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것도 행여나 먹물로 교실을 더럽힐까 먹을 멀리하는 교실의 풍경도 안타깝다한다.


 범지와 금초의 만남

 범지(凡志)는 이미 저 세상에 가버린 한 친구가 ‘글 쓰는 선생은 호가 필요하지 않겠냐’며 손수 지어준 호(扈)다. 평범하기도, 비범하기도 할 수 있다는 두 가지의 뜻을 담고 있다. 범지 선생이 26~27세의 나이에 지금의 서상동 서원 유통 뒤, 서실을 열었을 때였다. 범지 선생은 그녀가 우연찮게 서실을 방문한 계기가 인연이 돼 4년 정도의 긴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을 하게 됐다며 수줍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연애를 할 당시에 그녀에게 직접 서예를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결혼 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시작이 돼 현재 그녀는 경남서예대전 초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범지 선생은 늘 시작이 처음과 같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그녀에게 금초(今初)라는 호를 선물했고 그녀는 이제 금초 선생으로 통한다. 초창기 서예를 시작했을 때 집세도 못 내고 형님에게 손을 벌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는 범지 선생은 지금의 아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내조를 잘해 줬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가야를 품은 그의 작품

 2017년 문자문명연구회가 주관하는 문자문명전 때 탄생한 작품 구지가(龜旨歌)는 거북이의 신령스러움과 가야의 수장으로서 위엄을 품고 있다. 가로 140㎝, 세로 240㎝의 큰 작품은 액자 값만 해도 몇백이다. 범지 선생은 김해시가 가야왕도로서 시조인 수로왕의 탄강설화가 담긴 구지가를 기증하게 됨을 뜻깊게 생각하며, 청사 내 작품 전시로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난달 27일 김해 시청에 기증했다. 4년 전 완성된 가락국기는 또 다른 범지 선생의 작품으로 시간도 공도 많이 들였기에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 했다. 가락국기는 하루에 3~4시간 정도 집중해 보름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놀랍게도 한 번에 완성됐다.

 순수함이 담긴 그의 바람

 다가오는 60회 회갑을 맞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까 생각 중인 범지 선생은 아직 주제를 정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작품들로 대중 앞에 서고 싶다고 한다. 이전에 도자기에 도판 작업을 해 전시 한 적이 있었는데 호응이 좋았다. 늘 새로운 시도는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학교 다닐 때 어울려 놀던 서양화를 전공한 한 친구가 한 번은 콜라보를 제안했는데 적당한 기회를 찾고 있다. 범지 선생이 좋아하는 예술가는 제백석과 오창석이다. 제백석은 현대 중국의 화가로 이름은 황, 자는 위청이다. 젊은 시절 가난하여 학교를 가지 못하고 가구점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그는 간결하고 힘찬 붓을 휘둘러 초화(草花), 벌레, 새우 따위를 애정과 유머가 넘치는 화풍으로 많이 그렸다. 오창석은 중국 청나라의 서화가로 중후한 필선의 화법을 창출해 동양 회화미술사상 새로운 문인화의 경지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범지선생은 예술작품은 순수함이 결여되면 생명력을 잃는다고 생각한다며 두 화가를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든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붓 들 힘이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좋은 글씨, 좋은 작품을 작업하는 것이다.

 “서예는 제게 천직인가 봐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글을 씁니다.” 다시 태어나도 서예를 하겠다는 범지 선생은 오늘도 청우마묵헌에서 붓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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