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9:50 (토)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2017년 김해시의원 해외 연수 후기>- ④ 끝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2017년 김해시의원 해외 연수 후기>- ④ 끝
  • 하성자
  • 승인 2019.03.18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그 청년이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고 고인이 될 때까지 귀향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침내 사할린 땅은 그들의 터전이 돼버렸다. 사할린에서 그 청년들 열 명 중에 여섯은 가정을 꾸렸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나머지는 홀로 쓸쓸히 한 생을 살다 가셨다니 더 가슴 아팠다.

 사할린에서 우리 한인들은 부지런했고 우리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고 그 덕분에 우리 문화가 사할린 시민들에게 익숙한 자기 문화가 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예를 들면 유럽인, 아시아인을 떠나 사할린 인에게 김치와 나물이 사할린의 토착 음식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강제징용으로 시작됐던 사할린 생활이지만 그들은 자식만은 잘 키워내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들은 교육열이 대단했고 그런 속에서 한인의 세대교체는 여러 분야에 걸쳐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고 한다.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사할린의 한인들은 희망의 역사를 짓고 있었다. 사할린의 수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한인 2, 3세 출신 시의원이 두 명 있었으며 블라디보스톡이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로 나가 대학을 마치고 학계에서 활동하거나 사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강제징용자 후손들도 많다고 한다. 사할린에서 러시아 대륙에까지 사할린 한인 후손들은 그 삶을 러시아인으로 인지하며 한편으로 한인임을 잊지 않고 그 인식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뻗어나고 있다고 하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할린의 한인은 약 3만 명 정도로 사할린 인구의 5.4%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른들만 남아 지키는 현재 우리나라 우리네 고향처럼 사할린에도 대부분의 한인 젊은이들이 점전 줄어들고 노령에 접어든 한인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첫날 만났던 한인 1세대 어르신들은 그 부모로부터 강제징용과 이중 징용에 대해 숱하게 들어왔다면서 부모의 한을 어떻게든 풀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일본이 일본적십자 단체를 통해 사할린 한인단체에 후원금을 줬으며 매월 한인 경로당에 선물을 주는 등의 교묘한 변칙배상을 하고 있기에 그에 앞서 잘못에 대한 인정과 함께 진심어린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탄광과 공동묘역을 다녀오고 보니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참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가셨구나. 10대 후반에서 20대 청년들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극히 일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꼬드김에 속아서 사할린에 와서 지옥과 같은 탄광에서 강제징용 당했다.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혹사당하다가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다시 일해야 했던 서럽고 억울한 이야기를 우리는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들의 일생에서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런 힘이 돼 주지 못했다. 어느 한때 그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국가는 건재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의 안녕을 지켜줘야 한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이 한 몸같이 공생할 때 모두의 ‘안녕’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론적인 말이 한 세기 너머 망향의 고통들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편견 일곱- 나는 이상의 기록을 통해 머위에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왜 한인 이름이 적힌 묘지가 그렇게나 반가웠을까? 마치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러시아 땅에서도 극한의 땅, 극동의 언저리, 사할린에서 우리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보았다. 유인(孺人), 처사(處士)라는 비석의 용어와 김해김씨, 밀양 박씨 등 본관을 쓴 한글묘비가 제법 있었다. 머나먼 사할린 땅에 우리나라의 유교식 전통장묘형식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었다. 문화의 흐름을 생각했다. 문화를 형성하는 길은 사람이 만들어 낸다는 것을, 그런 이치로 그 묘역을 생각해 보매 사할린도 또 하나의 대한민국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중 3개월만 농사가 가능하다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사할린에는 어떤 농사를 지을까 궁금해 묘역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양옆의 밭을 유심히 살펴봤다. 보랏빛 꽃을 피운 감자 고랑이 싱싱했으며 수확할 때가 된 참깨가 심겨져 있는 밭이랑은 깔끔했다. 사할린에서는 쌀농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전쟁 끝에 피폐한 사할린에서,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연중 7개월 얼어붙은 극한의 땅에서 우리 징용자들은 그 시절에 어떻게 먹고살아냈을까. 선택의 여지없이 운명적으로 사할린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청년들의 그때를 생각하며 그들의 보릿고개를 뒤늦게 걱정해 봤다. 내가 어렸던 때의 보릿고개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밭에는 머위가 없었다. 밭 주변에도 머위가 보이지 않았다. 한인 후세들은 밭을 깔끔하게 맨다. 쓸데없는 머위도 일찌감치 뽑아 내 버린 것이 틀림없다.

 나이부치 탄광과 브이코프 공동묘역, 강제징용자와 이중징용자,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사할린, 북해의 여름은 무성했다. 머위도 무성했다. 그 옛날 발해가 누볐던 평원이 우람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브이코프 지역의 야산 공동묘역에서 습지대를 벗어난 낮은 언덕에 한인 징용자 묘지는 역사였다. 그들은 비석에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어로 혹은 한글로 된 이름자들이 역사였다. 치우침 없는 시선을 견지하자. 러시아 연해주의 섬인 사할린, 머위는 무성했지만 나는 더 이상 머위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위안부도 물론이려니와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한다.

 편견 여덟- 살아감이 역사이다. 선한 영향력, 올바른 역사를 위해, 삶은 훗날을 두려워해야겠지, 이 또한 편견일지라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