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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위해 칼을 휘두른 이국의 장군
조선을 위해 칼을 휘두른 이국의 장군
  • 천세훈
  • 승인 2019.03.0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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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훈 창원 경일고등학교 1학년
천세훈 창원 경일고등학교 1학년

 삼일절을 맞은 휴일, 가족과 함께 나들이 삼아 부산 자성대에 올랐다. 천장군 총독장, 화산군, 전첩유적 기념비를 돈 후 아버지가 한마디를 꺼냈다.

 "이 기념비 주인공이 누군지 아나?"

 천장군 기념비의 주인공은 천만리 장수. 아버지가 가끔 얘기하셨던 나의 시조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총독으로 5군의 대장이 돼 아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와 출정, 평양 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1597년 정유재란 때도 울산 싸움에 참전해 성을 지켜냈다. 천만리 장군은 무술년 삼로진군의 전력을 세워 재란 종결에 공이 컸고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보낸 쌀 54만 석, 금 65만 량, 은 15만 9천량, 포목 39만 9천120필을 무사히 수송하며 군수품의 보급과 재민 구호에도 큰 공을 세웠다. 국가의 공신이라 그런지 이진남대에 승전기념비라고 설치된 듯 보인다. 진남대의 진남은 장군의 지휘소였던 부산 진시성 남문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천만리는 명군이 회군할 때 함께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귀화했고 조정에서는 그를 화산군에 봉하고 훗날 순종이 충장공(忠莊公)의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의 귀화에 대해 `고종실록`은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다. 대체로 그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아서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무신으로 귀화했지만 문신으로 여생을 살면서 시 44수와 문 2편을 써냈고 이는 사암천문집으로 전해진다.

 타국을 돕기 위해 건너와 긴 시간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한 이국인의 장군. 장군은 중국 하남성의 영양이 본관이며 우리나라에선 영양 천씨의 중시조다. 이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여러 공을 세웠으나 천만리 장군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 또한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철거됐지만 이후 1947년에 다시 복구해 세워졌다고 한다. 비에는 "충장공 시호를 받은 조선 조정의 충신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국에서 건너와 전장을 누빈 천만리. 아버지의 입으로, 이런 기념 비석으로라도 그를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론 서글픈 마음과 함께했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비석 하나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나라를 위해 스러져 갔을까. 삼일절이라는 특수 때문일까? 우리나라를 더욱 소중히 하고 싶다는, 또 소중히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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