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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머위 탈출기- 사할린 브이코프 나이부치 탄광
  • 하성자
  • 승인 2019.02.27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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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2017년 김해시의원 해외 연수 후기>- ①

 편견 하나- 나는 편견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7월 27일 사할린 브이코프 한인 징용자 공동묘역에 머위가 무성했다.

 나는 왜 징용 관련한 근래의 역사적 사실에서 이토록이나 두려워하고 있는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그 뼈저린 아픔의 현장, 사할린에 다녀왔다. 나이부치 탄광으로 비롯된 사할린 강제징용자들의 역사, 그들은 큰 역사의 최전선에서 편견에 사로잡힌 소인배 위정자들의 권력 오용으로 힘을 잃고 주권을 상실했던 나라의 백성일 뿐이었다. 불행한 일생을 유발시킨 역사는 사할린 곳곳을 점령하고 있는 머위처럼 원인도 무성하리라.

 사할린 지역 탄광에서 노역했던 우리 청년들, 그 당시 한인 징용자들은 고인이 됐기에 우리는 그 후손들을 만났고 징용자들이 노역했던 현장을 둘러보고 여전한 더위를 안고 사할린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한 다리 건너의 증거만으로도 편견과 편두통이 생겨버렸다. 두통보다 편두통이 더 고통스럽듯이 역사는 큰 틀에서의 두통보다는 백성, 즉 서민단위 역사의 질펀 지끈한 편두통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 사할린에서 머위를 보았다. 군락을 이룬다는 것, 그 무성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편두통을 앓았다. 나는 편견을 두려워해야 한다. 역사를 말하고 써야 할 때 더욱 편견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나열하는 글자들은 7월의 어느 날 머위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긴 편견의 기억으로부터의 탈출기라고 해 두자.

 편견 둘- 7월 27일 사할린 브이코프 한인 징용자 공동묘역에 ‘머위’가 무성했다. 나는 우리가 봄에 먹는 하찮은 나물 풀, ‘머위’가 무서워졌다.

 더위는 사할린도 마찬가지였다. 사할린에서 두 번째 날 오후 3시, 우리 일행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청년들을 징용시켰다는 악명 높은 나이부치 탄광이 있다는 브이코프 지역으로 출발했다. 12인승 차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를 벗어나 토란보다 더 크게 자란 머위가 사방에 솟은 평원을 양옆으로 스쳐 가며 덜커덕거리는 길을 한 시간쯤 달렸다. 어느 마을 입구에서 탄광이 문을 닫을 때까지 광부 일을 했다는 한인 안내인 장씨가 합류했다. 다시 비포장 길을 30여 분 달려가니 시커먼 석탄 자국이 얼기설기 박힌 길로 접어들었다. 두 구비를 돌아든 막다른 곳에 차가 멈추고 그곳에 나이부치 탄광이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 앞쪽에 왕릉 크기만 한 석탄무더기 위에도 머위가 무성했다. 뼈대만 엉성하게 남은 입구 건물은 1970년대 러시아가 지었으며 트럭이 하루 종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 대각선으로 맞은 편 3층 건물은 태평양 전쟁 당시 밤낮없이 징용자들을 혹사시켰던 일본인 탄광 관리자들의 숙소와 사무실이었다고 하며 근 100년 다 돼 간다는데 얄밉게도 건물은 멀쩡해 보였다. 그 앞을 돌아 가파른 길로 올라가니 탄광 입구가 보였다. 입구 바로 앞에는 석탄을 크기대로 분류하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메시가 큰 철망 틀 장치가 있었다. 우리는 천정에 보호 빔이 설치된 입구를 지나 탄광 안으로 들어갔다. 탄광에는 강제징용 당시의 흔적이나 징용자와 관련한 어떤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80년대까지 운영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약 50m 정도만 개방하고 갱도를 막아놓았다. 아예 폐쇄해 놓아서 우리는 더 이상 탄광 안으로 깊이 들어가거나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저 갱도길이는 얼마나 될까? 깊고 어두운 굴 안에서 밤낮없이 혹사당하며 굶주림을 견뎠을 우리 청년들, 피눈물도 말라붙었을 처절한 하루하루가 매일같이 되풀이됐을 그때를 상상해보았다. 석탄보다 더 새카매졌을 그들의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이 이입되면서 갱도 안 어디쯤에는 분명 그들의 기억이나 기록이 어떤 흔적으로든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죽어 나간 이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요행히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었을 청년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던 귀국선 승선불허, ‘전환배치’라는 이름의 이중징용과 한인강제이주 등 억울했던 역사들이 이 탄광으로 해 비롯됐기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근 한 세기를 지나 그들의 나라에서 온 방문객인 나는 다만 그 어느 순간의 지점일지도 모를 그때의 지점에 서 있을 뿐이었다. 작업이 불가능한 몸이거나 죽어야만 나올 수 있었다는 탄광굴의 입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라고 했다. 비감한 마음으로 굴 안쪽을 응시한 채 자책하는 한반도 역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그 역사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나는 오랜 시간을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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