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8:04 (화)
늘 푸른 소나무
늘 푸른 소나무
  • 이영조
  • 승인 2019.01.20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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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조 동그라미 심리상담센터장
이영조 동그라미 심리상담센터장

기장군 철마면의 아홉산 숲,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힐링 명소가 있다. 산 정상부근에 아홉 개의 봉우리가 함께하고 있다고 해서 아홉산이라 불리는 이 산 아래 조남평 문씨 일파인 미동 문씨가 9대째에 걸쳐 400년 동안 공들여 가꾸고 지켜온 사유림을 일반인에게 개방해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림과 같은 아홉산 숲 이라는 걸출한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은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와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 조림지, 거대한 대나무 숲과 참나무 군락지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각자 그들로부터 경계를 조금씩 양보받아 사잇길로 연결해놓은 숲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고즈넉하게 걸으며 상념 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숲을 이루기 위해 온갖 식물들이 어우러지고 각자 존재의 소중함은 섣불리 어느 것이 우선이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단연코 400년을 훌쩍 뛰어넘은 수령에도 푸르름과 기개를 잃지 않은 소나무였다. 만고풍상에도 흔들림 없이 버티고 그 자리를 지켜낸 나무 중에서도 으뜸인 소나무는 세월 앞에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노화(老化)를 역행하고 오래된 시간 만큼 더 웅장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100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낙락장송 소나무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에게는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신이 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는 정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사람들, 올해 100세가 된 김형석 교수가 그렇고 연기자 이순재 교수가 있다. 두 분의 공통점이 있다. 비워진 욕심-지위, 재물, 음식- 타인의 눈총, 작은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온 분들이다.

 2019 기해년 새해 아침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된 두 분의 모습은 이순(耳順)에 접어든 필자에게 나침반이 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줬다. 연기자로 알려진 이순재는 85세 나이에 교수님으로 제자들에게 스승으로, 동료 연기자들에겐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다. 20년째 모 대학에서 석좌 교수로 활동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연기경력 60여 년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한다. 하루에 14시간의 활동을 소화해 내는 그분의 저력은 열정인 것 같다. 늦은 저녁 일과를 마칠 시간 그를 실은 차는 자신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달려간다. 피곤한 몸이지만 제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자기를 원하고 자기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다. 연기지도를 마치고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차에 오른 이순재 씨에게 던져진 질문 한마디 "피곤하지 않으세요?" "피곤하지, 하지만 보람 있잖나." 이 시대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봤다. 그가 이렇게 자기 일에 몰입돼 있는 것이 돈에 욕심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다. 하루에도 연극과 드라마를 오가며 동시에 여러 편을 촬영해도 대본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찰나의 시간도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고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대본을 외운다. NG가 4번 이상 나면 연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노력과 정신이 기억한 것도 망각하게 되는 나이임에도 3~4분 동안 계속되는 장문의 대사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원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죽지도 못할 만큼 의술이 고도로 발달된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 괴롭게 오래 사느니 즐겁게 오래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생각이다.

 70세가 넘은 테니스 동호인이 있다. 세월의 흐름에 몸의 외형은 노화를 벗어날 수 없으나 테니스 게임 중에는 눈빛이 달라진다. 상대방이 공격적 샷을 보내왔을 때 쏜살같이 공을 향해 달려가 힘껏 되넘긴다. 네트를 넘어 상대편 코트로 넘어간 공이 점수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박수와 함께 감탄의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코트 밖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회원들에게 손을 들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분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수줍듯 멋쩍은 미소가 번져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경기를 마치고 라커룸에 들어온 노 회원에게 물어봤다. "게임을 위해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속으로 다짐을 하지, 오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승패도, 체력적인 부담도 아니야. 자꾸 나이를 먹으면서 열정이 사라질까 그게 두려워." "열정이 사라질까 봐~" 그 말이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회오리쳤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게 아니고 스스로 늙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늙는다고 한다. 가슴속에서 열정이 사라지는 그 자체가 두렵다는 테니스 노회원의 말, 이순재 씨가 보여준 삶을 향한 열정, 김형석 교수가 들려주는 100년의 경험, 그것은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늘 푸른 소나무로 산다는 것, 이미 그렇게 살아오신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분들로부터 얻은 교훈을 실천하면서 즐기듯 살면 될 것 같다. 욕심을 부리기보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일, 아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것을 해내는 실천, 그 모든 것을 담은 열정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고 그 자리를 든든하게 지켜내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 인생의 후배들이 보내온 박수와 존경을 받으며 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늘 푸른 소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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