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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포대 도정해 부모 대신 자식에게 보내주죠"
"한두 포대 도정해 부모 대신 자식에게 보내주죠"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8.12.25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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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생초정미소 정을 찧는 박승 대표

정이 묻어나는 `주민 사랑방`

찾아오는 어르신은 한 가족

대도시 식당에서 구입 많아

단골 "어린 시절 먹던 쌀 맛"

박 대표, 박항서 감독 집안 사람

"키도 작은데 촌에서 해봐야…"

이런 말 심심찮게 들었는데

베트남서 성공한 모습 감동

 산청군 생초면은 베트남 축구대표팀 박항서 감독의 고향이다.

 베트남 축구계의 영웅으로 유명세를 타는 박 감독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고자 찾은 그의 고향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래된 정미소가 눈에 띄었다. 

산청 지역 주민들에게 정을 찧어 전하는 산청 생초정미소의 전경.
산청 지역 주민들에게 정을 찧어 전하는 산청 생초정미소의 전경.

 

쌀쌀한 겨울 날씨에 내 발걸음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 정미소.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발을 들여놓은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으로 다가왔다.

 대형 마트에서도 도정을 해 주는 요즘 세상에 정미소라니…. 그것도 밖에 놓인 깨끗한 택배 상자들을 보니 정미소가 성업 중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누구든 어린 시절 고향의 향수에 취할 때면 마을 한 모퉁이에 자리한 정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 기분 탓일까. 이곳 정미소는 고향의 아련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정미소 건물 외벽과 뒷마당에 옷을 입은 듯 두껍게 붙은 쌀겨를 보고 있자니 갓 지은 밥의 구수한 내음이 나는 듯했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푸드덕, 푸드덕`,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참새들이 훼를 치는 소리다. 참새들에게는 이곳이 그야말로 천국이 아닐까 싶다.

 생초정미소를 운영하는 이는 올해 49세의 박승 대표. 장인어른이 운영하던 정미소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부친이 아니라 장인어른의 가업을 이었다니 왠지 궁금해져 물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집사람한테 한눈에 반했지요. 어떻게든 장가를 들어야겠다 싶어 장인어른이 하시는 일을 제가 책임지고 해내겠다 약속드리고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그 뒤로 장인어른께 일을 배워 지금까지 제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생초정미소는 소규모 쌀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에게는 꼭 필요한 곳이다.

 "쌀농사를 대량으로 짓는 분들은 농협을 통해 수매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 특히 어르신들은 당신 드실 만큼, 또 자식들에게 보낼 만큼만 농사를 지으니 그분들이 쌀을 드시려면 정미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쌀농사를 지어도 정작 내가 먹을 쌀을 마트에서 사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박승 대표는
박승 대표는 "산청군에서 생산되는 쌀의 우수한 품질과 자신의 도정기술을 활용하면 정미소를 운영할 만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지역 어르신들의 아들 역할도 도맡아 한다. 20년 넘게 지역에서 정미소를 운영한 탓에 어르신들의 쌀을 보관해 주는 창고지기 역할도 덤이다. 쌀이 필요하다 연락이 오면 그때그때 1~2포대씩 도정해 가져다드리고 자식들에게 쌀을 부쳐달라는 부탁에 택배도 대신한다. 수수료는 현금으로 주시기도 하지만 쌀로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박 대표의 이런저런 입담 속에는 장사가 아니라 정미소를 찾는 어르신들을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진솔함이 묻어 나는 듯했다.

 "한 두 포대 도정해 10~20분 거리에 있는 어르신들 댁에 가져다드리다 보면 사실 기름값도 안 나옵니다. 하지만 70~80세가 넘은 어르신들이 수확한 쌀을 정미소에 가지고 오시는 것도, 도정한 쌀을 찾으러 오시는 것도 쉽지 않으니 제가 가져다드려야지요. 그러면서 어르신들 생활은 어떤지 들여다보기도 한답니다."

 본인 입으로 말은 안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다 안다. 박 대표가 쌀 배달을 다녀올 때마다 들린 집에 고장 난 문고리나 전등을 교체하고 가스, 수도점검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런 그의 심성 탓일까. 박 대표 정미소에는 먼 곳에서 쌀을 주문하러 직접 오는 사람도 있다. 입소문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전화로 주문하는 오래된 단골도 상당하다.

 "밥맛은 뭐니 뭐니 해도 갓 도정한 쌀로 짓는 밥이 제일 맛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생초는 미질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라 밥맛은 정말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서울이나 대도시 유명 식당에서도 우리 정미소 쌀을 먹어 보고는 생초쌀만 구입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우수한 품질과 자신의 도정기술을 활용하면 정미소 운영은 할 만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조금 이르지만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박 대표는 "제 고객님들 중에는 20년 넘게 쌀을 주문하는 분도 계십니다. 우연히 우리 정미소를 알게 된 한 70대 어르신은 `어린 시절 먹던 쌀 맛`이라며 평생 먹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어요.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쌀은 우리 주식이자 한국인의 얼이 담긴 음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계가 하는 정미가 아닌 사람이 하는 정미. 노하우와 기술이 담긴 정미를 하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갓 정미한 쌀을 택배상자에 넣고 있는 박 대표.
갓 정미한 쌀을 택배상자에 넣고 있는 박 대표.

 

 박항서 감독의 어린 시절에 대해 슬쩍 물었다. 알고 보니 박 대표와는 가까운 집안 식구. 박 대표 장인어른은 생초중학교 초대 축구 감독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박 감독에 대해 "상대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자랐죠. 언제나 악바리 근성을 가진 노력파이자 성실파로 인정받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축구 인생은 쉽지 않았어요. 고향에서마저도 `키도 작은데 촌에서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라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어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이처럼 멋진 모습을 보여주니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합니다. 지금은 동네 어르신들이 얼굴만 마주하면 `생초에서 큰 인물이 났다`며 박 감독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박 대표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 기다렸다는 듯이 쌀 사러 왔다는 차량들이 잇따라 정미소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갓 지은 밥 같은 구수함이 묻어나는 인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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