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1:36 (토)
용서받지 못한 자들
용서받지 못한 자들
  • 이광수
  • 승인 2018.12.20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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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ㆍ주역명리작명가
이광수 소설가ㆍ주역명리작명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나쁜 사람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더 나쁜 악랄한 자의 힘이 필요하다.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지난 1993년 마카로니 웨스턴 마지막 출연작으로 개봉된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해 아카데미영화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용서를 받지 못한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불러온다. 새삼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우리 정치 권력사의 비극을 보는 것 같아 들먹여 본 것이다. 엊그제 창원대로를 지나다가 가로수에 걸쳐 어지럽게 내걸린 플래카드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을 봤다. 멈춤 신호에 대기하면서 자세히 보니 김정은 북한 공산당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뜨겁게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그 플래카드 내용이 보기 싫었던지 몰래 칼로 도려낸 것 같았다. 그런데 소신 없는 복지부동의 공무원들은 내용에 상관없이 플래카드 지정 거치대에 설치하지 않은 불법 광고물인데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다. 공권력보다 무서운(?) 모 단체의 반발이 두려웠던 모양이지만 이는 분명히 직무유기다. 하기야 시청 스스로 지정 거치대가 아닌 가로수에 걸쳐 각종 시정 홍보나 계도용 플래카드를 걸고 있으니 시민들이 그걸 지킬 리 만무하다. 행정 스스로 불법행위를 저지르면서 어떻게 시민들을 계도하고 질서유지를 강제할 수 있겠는가. 공권력 사각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플래카드가 도심 한복판에 난무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심정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두 편으로 갈라져 극한 대립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1인당 GNP 3만 불 고지를 16년 만에 달성하고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감안할 때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국민 정서를 어떤 현상으로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한때 금방 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사람들을 들뜨게 했던 남북정상회담과 우리 대통령의 평양방문 열기는 북미회담 연기와 곤두박질친 국내경제의 악화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잔뜩 기대했던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 답방은 오리무중 상태이다. 핵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남북화해와 평화무드를 조성하려던 새 정부의 구상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허둥대며 속만 태우고 있다. 70년 분단의 긴 세월이 배태한 남북 간의 이질성과 상이한 통치이념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 극복과 긴 시간의 대화 교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부 조급한 진보세력들은 금방 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민심의 향배를 호도하고 있다. 한편, 편향된 보수집단은 북한이라는 체제 자체를 불신하며 부정하고 있다. 분단 70년 동안 이질화한 남한과 북한이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데는 지난 시간만큼 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 내부부터 화합과 통합의 컨센서스 확립이 시급한 과제다.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과거 들추기에 몰두한 채 흠잡기로 일관해서는 내부 분열만 더욱 조장할 뿐이다. 시대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해졌던 과거사는 일부 오해와 진실 호도의 흠이 있었더라도 그 시대적 정황이 낳은 아픔 정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후 객관적인 판단으로 그 공과를 명확히 해 역사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일단락 지어야 한다. 마녀사냥식 한풀이가 계속되면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벌린 복수극이 재연될 뿐이다.

 수년 전 필자는 모 시의 시사편찬 책임을 맡아 시사를 편집하면서 이 지역에서 활동한 유명 문인에 대한 족적을 정리한 적이 있다. 그분이 이 지역에 남긴 문학적 업적은 자타가 공인 할 만큼 크고 위대했다. 그러나 한때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행한 친일행적에 대해 무척 고민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 분의 공적 기록 말미에 그의 일시적 과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한 때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행한 선생의 친일 행적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의 교훈으로 회자 될 것이다.` 그분에 대한 평가를 후세의 판단에 맡긴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있게 한 원천이다. 과거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듯이 현재 없는 미래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일에 매달려 남 탓으로 날밤 지새며 벌이는 진흙탕 싸움은 자승자박이나 다름없다. 적과 동지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일 뿐이다.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며, 석가는 왜 자비를 베풀라고 했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죄짓지 않고 사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세상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돌고 돌아오는 법이기에 오늘 내게 옳다고 행한 일이 내일은 옳지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다. 길흉화복이 순환하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른 일들은 상황변화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적당한 시점에 돌아볼 줄 안다면 절벽 앞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 우리가 잠시 숨을 멈추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용서의 관용을 보인다면 누구나 존엄하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복수가 더 큰 복수를 낳는 `용서받지 못한 자`가 사라지고, 화해와 용서의 큰 강물이 노도처럼 넘쳐흘러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신뢰 사회가 이룩되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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