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그늘
침묵의 그늘
  • 경남매일
  • 승인 2018.03.0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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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옥 수필가

 물꼬는 트였다. 그동안 넘치지 못하고 부글거리고만 있었던 고인 물이, 트인 물꼬를 통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거의 범람 수준이어서 감당이 어려울 지경이다. 본성에 잠들어 비몽사몽 하던 남자의 본능이 낱낱이 드러나고 해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를 거쳐 오며 각질화 된 남성의 본능과 속성, 힘과 권력의 엇나간 발현, 그 속에서 갑과 을로 나뉜 남성과 여성의 비천한 관계도가 성적인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낮과 밤의 공존은 빛깔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거스를 수 없는 준엄한 생태계의 순리이며 순환이다. 겉과 속은 동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필요와 불필요로 구분된다. 남성과 여성도 마찬가지다. 우주 원리의 근본이며 음양 조화의 근원이다. 그 조화가 세상을 이루고 만들어 나가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요즘 그런 조화가 흐트러지고 깨지는 소리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서 열정을 불사르는 선수들을 향한 응원의 박수 소리마저 ‘me too’를 부르짖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흡수했던 듯하다.


 관행이나 관례는 다분히 시간과 함께 진행되는 것이리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속에는 묵인과 복종, 체념이 들어가서 더욱 힘을 발휘하고 견고해지는 것 같다. 오래 묵힌 것은 냄새도 진하고 고질화되기 쉬워 도려내고 씻어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꼭꼭 여며져 있던 실상이 드러나면서 우리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심각하다.

 ‘괴물’들의 추악한 행위가 이뤄진 방을 사진으로 봤다. 마치 단단한 요새처럼 굳건하고 어둡다.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이 돼버린 탓인지 사물을 비롯한 모든 것이 음산하고 어둡다. 연극계 대부의 황토방이 그렇고 연예인 교수의 오피스텔이 그렇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방식과 언어로 발뺌을 하고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연극계의 거물은 기자회견장에서 숙련된 몸짓으로 연기를 하고 연예인 교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참담한 어조로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여자를 상대로 한 남성들의 힘의 확인, 정복욕 획득은 실로 절망적이며 추악할 뿐이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이용해 여자의 성을 유린하는 남자의 본능은 얼마나 원시적인 속성인가.

 알고도 몰랐던 침묵의 그늘이 그러할 것이다. 기존의 것이 지켜져야 하고 진행돼야 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조력하며 침묵하는 것이 그 관행의 바닥에 깔릴 수밖에 없었을 터. 때리는 시어머니를 보고도 말리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미움받지 않으려는 영악한 시누이였을 옆의 사람들. 뻔히 알면서도 그냥 눈감고 귀 막아 버리는 조력자와 방관자들에게 오히려 더 분노가 생기는 것 같다. 한 번쯤 용기 내서 그들을 보호하고 막아 줄 수는 없었을까.

 불온한 것이 힘을 발휘하고 지속되기까지는 차가운 방관과 무책임이 동반한다. 결국 그것이 관행이나 관례가 되면 주변인들조차 슬그머니 책임에서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시간과 함께 견고하고 차갑게 굳어지고 만다.

 세상은 꽤나 정의로운 듯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오히려 부조리와 불온의 힘이 더 막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굳어진 묵시와 묵언은 사람의 시고나 행동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주의하라’, ‘조심하라’고 했던 바람 같은 무책임의 말이 하나의 변명이 되고 명분의 말이 된다. 왜 그때 방관했냐고 묻는 자에게 또 침묵하면 되는 것이기에.

 갈수록 세상은 소용돌이 속이다. 정치계, 경제계 할 것 없이 아귀다툼에 아우성이다. 마치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 날카로운 날을 세워 달리는 빙상경기처럼 말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물이 흠뻑 들어 우리 곁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얼어붙은 동토다. 침묵의 그늘에서 얼어버린 수많은 여자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그곳에서 꽃이 필 날이 오긴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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