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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와 배려
하브루타와 배려
  • 정창훈
  • 승인 2017.08.23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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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객원위원
 하브루타(Havruta)는 친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인 하베르에서 유래한 용어다. 이는 나이와 직업, 직위와 성별에 관계없이 두 명이 짝을 지어 서로 논쟁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 경전인 탈무드를 공부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교육과정에 적용된다.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교육법이라고 하지만 공부법이라기보다 토론 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브루타는 소통을 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상호이해와 조화를 전제로 지식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찬반양론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므로 이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결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이때 부모는 자녀에게 교사는 학생이 마음껏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자녀와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필자의 지인은 할머니와 살고 있는 6살 조카가 삼촌에게 “세상일이란 것이 뜻대로 안 되는 것 맞지”라는 어른스러운 질문을 했다고 한다. 어린이가 묻는 말이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인은 조카에게 대답을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일도 이뤄질 수 있다”라고 했단다. 조카와는 나이, 성별, 관계를 초월해 진정성 있는 하브루타로 각자가 원하는 답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화의 장, 특별히 아이들하고 대화를 할 때 모르면 모르는 대로 피하지 말고 눈을 마주 보면서 모른다고 대답을 하면 된다. 어찌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질문에 진지하게 반응을 해주는 관심과 배려가 우선돼야 한다.

 우리 민족은 밥상(식사자리)을 식사하는 본연의 목적뿐만 아니라 예절 및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다. 밥상머리 교육은 대화시간을 많이 가지거나 일방적인 대화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온 가족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사랑과 보살핌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을 키우기 위해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로 소통하는 대화에서 시작돼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끼리 함께하는 식사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의 행복한 시간을 함께할 여유가 있다. 함께 모여 식사하면서 대화를 통해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성과 사회성을 키울 수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도 매일 6시 30분에 가족과 저녁 먹는 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면 정서적으로도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이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반드시 대화부터 시작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배려를 생각할 수 있다. 이솝우화에서 서로 입 모양이 다른 여우와 두루미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먹기 편한 그릇으로 음식을 내놓는다. 결국 상대방이 만든 음식을 먹지 못한다. 동물들의 생김새 차이와 배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내 입장만 생각한다면 절대 상대방을 배려할 수 없다. 만일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의 다른 모습을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서로를 배려하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 그런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갈수록 바쁘다는 일상에서 인간관계는 철저히 개인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혼밥, 혼술, 혼영 등 차가워진 세상 속에서 온기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배려를 말한다. 하지만 그 배려라는 것이 소통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뤄질 땐 배신감을 자아낸다. 배려가 우려와 염려를 자아내는 것이다. 상대방을 생각해 한 행동인데 그걸로 인해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배려를 했다고 생각한 본인은 기뻐하지 않는 상대방을 보며 괘씸해 한다. 이렇게 배려가 엉뚱하게도 상처를 주는 경우는 부모ㆍ형제ㆍ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소통은 사람과의 진실된 관계에서 시작된다. 관계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바람직한 소통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모든 일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기에 급급하다 보면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자 하는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듣기 때문에 상대에 따라 듣기 스위치를 꺼버리면 아무리 얘기해봐야 그 말이 귀에 들려올 리가 없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듣고자 할 때 상대방이 어떤 서툰 말이나 행동을 해도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브루타 소통은 경청에서 경청은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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