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고삼국사기’를 인용한 내용이 있다. 하백의 딸 셋이 청하(압록강)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을 때, 해모수가 웅장한 궁실을 짓고, 그들을 초청해 ‘술대접’을 했다. 해모수가 그 중 첫 딸 ‘유화’를 유인해 동침하고는 주몽을 낳았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고구려는 지주(旨酒)를 빚어 한나라의 요동 태수를 물리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양조기술이 발달됐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국의 농업백과전서인 ‘제민요술’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파된 독특한 술까지 빚게 됐고, 백제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에 전한 술이 일왕오진(日王應神: 270∼310)의 입맛을 사로잡아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 반면 소주는 우리 고유의 술이 아니다. 고려 때 몽골인이 먹던 소주가 전해진 것이다. 이때 소주는 지금처럼 에탄올을 물에 타 희석시킨 소주는 아니다. 이규보의 ‘국선생전’을 보면 이화주, 자주, 파파주, 천금주, 소주, 초화주, 녹파주 등 수십 가지의 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때는 집에서 담가 먹는 가양주(家釀酒)가 많았다. 그 중 약산춘(藥山春: 서울), 호상춘(壺山春: 전북), 노산춘(魯山春: 충청), 벽향주(碧香酒: 평안)가 유명하다. 1900년대 일제는 술에 세금을 매겨 가양주 제조를 면허제로 바꿨다. 면허장 때문에 1916년 36만 개, 1929년 265개소, 1932년 10개소로 줄었다. 광복 후 6ㆍ25전쟁을 거쳐 ‘양곡 보호령’이 선포돼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 후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등을 계기로 우리 전통주 제조를 면허제로 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술에서 파생된 ‘유머’를 보면 매사에 얽히고설킨 것은 술을 먹으면 술술 풀린다고 해 이름 지었다. 애주가의 애창가(愛唱歌)를 보면, 월요일은 월급 타서 한 잔, 화요일은 화끈하게 한 잔, 수요일은 수시로 한 잔, 목요일은 목로에서 한 잔, 금요일은 금방 마시는 한 잔, 토요일은 토하도록 마시는 한 잔, 일요일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 잔 한다고 변명한다. 음주량에 따라 9급은 분위기에 한 잔, 7급은 소주 한 잔 맥주 두 잔, 5급은 술김에 외박, 3급은 소주 3병 이상, 1급은 매일 2병씩 한 달 이상을 먹는 실력이다. 유단자로는, 1단은 1차에서 5차까지 마시고, 3단은 해장술의 양이 전날 마신 술과 동일하게, 5단은 끼니마다 소주 한 병씩 반주로 마신다. 7단은 술집을 그냥 못 지나가고, 9단은 해갈할 때 소주를, 10단은 주신으로 술 먹고 죽는 사람이다.
애주가의 애칭으로 酒童(주동)은 술맛도 모르면서 마시고, 酒卒(주졸)은 한 두 잔정도 마시고, 酒軍(주군)은 술꾼이라고 부를 정도로 마시고, 酒豪(주호)는 공짜 술만 마시고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酒監(주감)은 친구에게 술을 사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 酒將(주장)은 누구나 알아주는 술꾼, 酒好(주호)는 술 없이는 못 사는 사람, 酒仙(주선)은 술 먹다가 죽는 사람이다. 즉, 당나라 酒(李)태백같이 술을 지고는 못가도, 먹고는 갈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술에 만취하면, 사장은 여자에 취하고, 전무는 술에 취하고, 계장은 눈치 보기에 취한다. 말단은 빈 병 헤아리기에, 마담은 돈 새기에 정신이 없다. 처음 1병은 이 선생, 2병째는 김 형, 3병째는 여보게, 4병째는 어이, 5병째는 야!, 6병째는 이 새끼, 7병째는 ‘엠브란스’ 신세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 요즘 술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많다. 그러나 오늘은 갈지(之)자로 걷지만, 내일은 한일(一)자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며 술 먹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