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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도요지 재조명
웅천 도요지 재조명
  • 정창훈 기자
  • 승인 2016.12.01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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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훈 객원위원
 창원시 진해구 두동에 있는 웅천 도요지(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160호)전시관에서는 매년 11월 ‘웅천 선조 도예인 추모제’가 열린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망국의 혼이 된 웅천 도예인들의 영령을 위로한다. 창원지역 선조 도예인들이 겪었던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선조들이 남겨준 아름다운 웅천 찻사발의 가치를 계승해 도예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행사다.

 웅천도요지는 조선 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보배산 기슭의 점골에 위치하고 있다. 보배산은 부산 강서구와 경남 창원시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해발 479m 나지막한 산이다. 원래 명칭은 보개산(寶蓋山)이었다. 말 그대로 보물을 덮어놓은 산으로 최근에는 보배산으로 더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지난 1598년 웅천현 보배산 기슭(현 창원시 진해구 두동 147일대 웅천 점골 가마터)일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을 받은 히라토 영주 마츠우라 시게노부 등에게 웅천도요지의 사기장과 그 가족을 포함해 125명이 일본 히라토 섬으로 납치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왕조의 도자기 발전에 커다란 타격을 가해 전국적으로 많은 가마들이 파괴됐다. 유명한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끌려감으로써 이때부터 일본은 도자기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됐다. 특별히 일본의 큐슈와 야마구치현 도자기산업의 부흥은 서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의 피와 눈물이었다.

 지난 2002년 이곳 웅천도요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모두 6기의 가마터가 확인됐으며 분청사기와 회청사기, 백자, 옹기, 이도류 등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이 가운데 이도류는 도요토미가 가져간 이도다완의 원류로 추정됐다. 일본이 조선 사발을 이도다완이라고 부르는 배경에는 보개산에서 생산된 사발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일본 다완에 영향을 준 조선 사발을 만들었던 웅천도요지는 조선 시대 무역자기를 제작하던 곳이다.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가져간 찻사발을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 부르며 참모들과 다회(茶會)를 열었고, 그때 사용한 찻사발이 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이다. 그때부터 조선 사발은 이도다완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에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사발을 막사발이라고 칭하는 데는 조선 사발을 깎아 내리고 그 맥을 끊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가 숨어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1천600도 이상의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굽는 기술이 없었다. 조선에서 끌려간 사기장들이 일본에 그 기술을 전수했다. 그러면서 메이지유신 이후 문호를 개방한 일본이 도자기를 해외에 팔아 국부를 쌓으면서 주변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발은 예로부터 전래돼 오는 우리의 생활 그릇으로 그 연원은 깊다. 문헌상으로 고려 시대의 청자에서 조선 시대에는 백자 또는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 아래는 좁고 위는 넓게 만들어져 밥이나 국그릇, 찻그릇으로 사용된 생활 용기였다.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차 공양 그릇이나 제기로도 사용했다.

 막걸리의 ‘막’처럼 막 만들었고 막 쓰는 그릇이라 해서 그렇게 불리었는데,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생활 그릇으로 쓰이던 것이다. 금이 가면 막걸릿잔, 심지어는 개밥그릇으로도 썼다. 이 그릇은 예로부터 우리들 주위에 흔하게 있어온 터라 그 가치나 중요성이 무시돼온 게 사실인데, 이 ‘조선 사발’의 가치와 그 아름다움이 부각된 것은 우리나라에서가 아니라 차(茶)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라니 기막힌 일이다.

 세계 도자기의 발달은 토기에서 도기와 석기로, 도기와 석기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백자로 발전됐다. 그 가운데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는 예술적으로 우수한 도자기로 한층 여유롭고 풍요로웠다고 본다.

 웅천의 찻사발은 그릇의 선이 아름답고 허리 부분이 깊은 질그릇이다. 원형으로 그릇의 끝부분이 젖혀있고 그릇 안쪽에는 둥근 앙금 자리가 있어 다른 찻사발과 구별이 된다. 사발 입시울이 되바라지고 허리에서 몸통에 걸쳐 둥글게 부풀고, 굽은 높고 크게 깎았으며 굽 바닥에서 몸통까지 다소 두껍게 성형된 것이 특징이다. 특별한 기교나 장식도 없이 무심으로 빚어놓은 웅천 찻사발에는 자연스러움이 녹아있다. 이는 타고난 손재주보다는 장기간 체득된 기술과 열린 마음에서 우러나와 원형의 멋을 충족시키는 다도 문화에도 크게 부합하고 있다.

 ‘웅천선조도공추모제’와 ‘웅천 찻사발 축제’를 통해 웅천도요지와 웅천 찻사발이 세상에 더욱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 웅천 도자 문화에 대한 연구와 시대가 요구하는 미학적 가치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되고 있다.

 웅천 찻사발의 재조명은 우리 선조 도예인들을 통해 오늘날에 전해 내려오는 전승 기법을 계승하고 이를 발판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예 체계의 구축이 우리의 소명이다. 전승 도예가 옛스러움의 모방과 재현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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