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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館(춘추관)
春秋館(춘추관)
  • 송종복
  • 승인 2016.04.20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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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春:춘 - 봄 秋:추 - 가을 館:관 - 건물

 중국<4서5경>의 ‘춘추’에서 따 온 이름으로 춘추관이라 부른다.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 시정을 기록하던 관청이다. 요즘 춘추관이란 청와대 안의 건물로 ‘메스컴’의 산실이다.

 ‘춘추관’은 고려 초에는 사관으로, 1308년 충선왕은 예문춘추관으로, 1325년 예문관ㆍ춘추관으로, 1356년 사관으로, 1362년 다시 예문춘추관으로 했다. 1392년 조선 태조는 교명ㆍ국사의 일을 담당하는 예문춘추관을 설치하여,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수찬관이 경중과 지방의 사초를 보내오게 하여 편찬 일을 맡던 곳이다.

 춘추관의 사관은 문과에 급제한 자가 주로 임명받았다. 그 직위는 낮지만 왕 곁을 떠나지 않고, 국가의 중대사에 모두 참석하기 때문에 그 직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사관은 매일 시사(時事)를 사초에 작성해서 이를 시정기(時政記)를 편수한다. 이렇게 작성된 사초는 국왕도 볼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춘추관에 편찬된 실록은 각처 사고(史庫)에 보관하고 자신도 1부를 보관한다.

 조선시대 사고는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4곳에 있었지만, 임란 중에 전주사고를 제외한 3곳은 불타 버렸다. 임란 후 전주 사고 본을 복사해, 서울과 산중(山中) 4곳으로 옮겼다. 서울 춘추관 사고는 이괄의 난(1624) 때 소실됐다. 나머지 정족산 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태백산 본은 국가기록원(부산지소)에, 적상산 본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돼있다. 반면 오대산 사고 본은 191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됐다가 2006년 7월에 47책을 반환받았다.

 <조선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실록은 왕이 죽은 후에 전(前)왕의 행적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했다. 실록과 같이 기록유산을 남기고, 철저히 보존했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은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필자는 <조선실록>이 아닌 <이조실록> 50권을 소장하고 있다. 이유는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한글판’으로 번역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항상 자기가 종주국으로 여기고, 한국을 비하해 이씨(李氏)가 건국했다 해 <이조실록>으로 책명을 바꿔 1980년대 남한으로 판매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요즘 ‘매스컴’에 자주 ‘춘추관’이란 말이 등장한다. 지금의 ‘춘추관’은 조선의 춘추관과는 판이하다. 춘추관이란 청와대 내에 있는 관공서의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춘추관은 전국에 너무 많다. 이 명칭을 살펴보니, 부산 사상구 가야대로, 광주 동구 문화전당로, 서울 종로구 팔판길, 경기 안성시 미양로, 서울 관악구 신림로, 경기 화성시 우정매향리, 대구 덕산동 등 수없이 많으니 뭐가 진짜 춘추관인지 외국인의 눈에는 한심한 작태라고 할 것이다. 국가의 고유관청 명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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