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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도덕경)
道德經(도덕경)
  • 송종복
  • 승인 2016.04.13 2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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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道:도 - 길 德:덕 - 큰 經:경 - 글

 노자가 실존인물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한대(漢代)에는 성(姓)이 이(李)라 하고, 주(周) 왕조의 사관은 유교의 개조인 공자도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도 전한다.

 일명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 하며, 도교의 ‘바이블’이라 한다. 이 책의 상편 37장은 <도경(道經)>, 하편 44장은 <덕경(德經>이다. 따라서 도덕경이라 한다. 이를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여러 차례 편집된 것으로 보아 BC 4세기경에 지었다고 한다. 한(漢)의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한 왕필본이 있다.

 노자는 어머니가 노처녀로 있을 때 하루는 밤에 북두칠성이 안개로 자욱이 변해 내려와 노자의 처마 폭에 들어갔다. 이로써 임신이 돼 노자는 어머니 태내(胎內)에서 81년간이나 있다가 좌액(左腋)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머리털이 백발이고 못하는 말이 없어 ‘생이백발능언(生而白髮能言)이다’고 했다. 따라서 그를 늙은 자식이란 뜻에서 노자(老子)라 불렸다. 또한 태어날 때에 오얏나무[李樹]를 가리켰다 해 姓이 이씨(李氏)가 됐다는 설도 있다. 또 역대마다 황제(黃帝) 시대에는 황성자(黃成子), 요(堯) 시대에는 무성자(務成子)가 됐다는 등 갖가지 전설로 신격화됐으며, 마침내는 천존의 화신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시에도 도교사상이 있고, 당(唐)의 고조는 고구려 영류왕 때 도사 숙달과 <도덕경>을 보내왔다. 최초의 도교신자는 연 개소문(淵 蓋蘇文)이다. 백제는 무령왕릉의 벽화에 도교사상이 엿보이고, 신라의 화랑도에 유불선 사상이 내포돼 선이 도교의 사상이다. 고려 예종은 청연각을 세워 한안인(韓安仁)에게 <도덕경>을 강론케 했고, 조선은 주자학사상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됐다. 그러나 박세당(朴世堂)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을, 이이(李珥)는 <도덕경>을 줄여 <순언(醇言)>이라는 주석서를 편 것을 보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춘추말기에 20여 세 연하의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노자>책은 전국(戰國)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이런 전설 같은 기록에도 <도덕경>은 수많은 사람에게 큰 영감을 줘 <성경>책 다음으로 많은 번역본이 나왔다. 공자의 실명은 공구(孔丘)이지만, 노자의 실명은 이이(李耳)이다. 당(唐)의 태조 이연(李淵)은 노자(老子)[본명 李耳]의 후손임을 자처해 국내에서는 불교성국이었으나, 왕실에서는 도교를 믿었다. 노자는 세상에 있음과 없음, 높음과 낮음, 긺과 짧음, 어려움과 쉬움, 앞과 뒤 등으로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반대 짝이 없이는 못산다고 했다. 이같이 20대 국회의 정치판에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찬성과 반대를 포용하는 노자의 <도덕경>을 원용하는 참신한 정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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