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12:53 (토)
불효자 어벤저스
불효자 어벤저스
  • 김혜란
  • 승인 2015.12.30 2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온갖 상념들이 밀려오는 세밑이다. 꽤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산동네에서 유수한 법대에 아들을 보낸 집이 있었다. 엄마는 화장품 외판원을 했고 아빠는 법대 나와서 평생 놀고 계셨는데, 이 분이 히트를 쳤다. 법대 다니던 아들이 졸업할 무렵, 그동안 키우는데 든 비용을 꼼꼼히 적은 종이를 내놓은 것이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동네에 퍼졌다. 아들을 하늘처럼 여기고 아들 키우는 데만 평생을 바쳐온 엄마가 동네 수퍼에서 막걸리 한잔 하면서 남편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했다. 그때는 그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이 똑똑하고 잘 났다고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닌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서류를 만들었을까. 법대 나온 그 아들의 아버지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혀를 내둘렀다.

 이른바 ‘효도각서’가 화제가 되고 있다. 부모님을 잘 부양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정작 어머니의 병간호조차 외면한 아들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반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효자방지법’도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됐다. 자식에게 한 번 물려주면 되돌릴 수 없도록 한 조항을 없애고, ‘학대나 현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증여를 되돌릴 수 있도록 폭을 넓히고, 그 물려받은 재산으로 얻은 이익까지 내놓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산동네 법대 출신 아버지와 아들이 새롭게 비춰진다. 그 아버지는 출세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아들이 만약 평생을 바쳐 키운 자신들을 모른 척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들의 노년대비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서류로 남겨야만 법적 효력이 있음을 법대 출신이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쩌면 그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세태가 변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내리사랑’을 따라올 수 없는 ‘치사랑’이, 결국 노년의 부모들을 거리로 내몰 가능성을 시대를 앞서서 예측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은 ‘孝(효)’의 개념이 동양과 다르다. 동양에서는 도덕과 윤리의 가치이고, 정신적인 질서로 해석하지만 서양은 지켜야 할 ‘의무’로 해석하고 있다. 동양의 ‘효’는 흘러간다. 멈춰 있지 않다. 아이였을 적에는 효가 무엇인지 모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제야 효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 부모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는다. 불효자는 부모가 돌아가고 나서야 효를 생각한다. 요즘은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

 공자는 삼년상이 너무 길다는 제자의 말을 듣고 이렇게 설파했다. ‘자식은 삼 년이 지나서야 겨우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도 살 수 있다. 그런데 부모 돌아가신 뒤 삼 년 부모 앞을 지키는 일이 그리 못할 짓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삼 년 동안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하면 죽고 마는데, 자신이 받은 사랑과 돌봄을 부모의 죽음 앞에서 삼 년 동안 그대로 돌려주며 슬퍼하는 것이 천하의 보편적 도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부처의 제자인 목련존자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남겨둔 재산을 탕진하다가 결국 병이 들어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머니는 지옥으로 떨어졌고 부처에게 간청해서 인간의 몸으로 지옥을 찾아간다. 어머니를 위해 지옥에 남아 업을 닦고 결국 어머니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목련존자는 효의 대표급 어벤저스다.

 터키의 한 계곡 절벽에 위치한 동굴 교회에는 감동적인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고 승천한 뒤에도 성모 마리아는 앞서 보낸 아들을 생각하며 슬프게 살았다. 그런 엄마 마리아가 세상을 뜨려 할 때, 승천한 예수가 이번에는 땅에 내려와 상주로서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벽화다. 예수 왼쪽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있다. 지금은 예수가 엄마 마리아의 영혼을 가브리엘에게 부탁하는 것이 벽화내용이다. 효자 예수는 엄마 마리아의 임종을 지킨 것이다.

 효의 수직적인 가치가 제대로 서 있기 위해서는 수평적 가치가 단단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인간으로서 삶에 녹여내야 하는 수평적인 가치인 믿음과 배려, 예의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희미해지고 부실해져 가고 있다. 바닥이 튼튼해야 건물이 설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 심성들에 대한 교육이 사라지는 교육시스템부터 따지지 않는다면 어떤 ‘불효방지법’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