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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김(苔) 누가 만들었을까
먹는 김(苔) 누가 만들었을까
  • 송종복
  • 승인 2015.11.09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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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전남 광양에서 김여익(金汝翼)이 임금께 손수 만든 해산물을 진상으로 받쳤다. 조선 16대 인조(仁祖)는 수라상에 새까맣고 종이 같은 반찬(김)이 나오자 어리둥절하다가 먹어 보았다. 맛이 너무 좋아서 내시에게 이름이 뭔지 물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 한 신하가 ‘광양 땅에 사는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 고 아뢰자, 임금이 그 자리에서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성을 따서 ‘김’으로 부르도록 해라고 분부해 ‘김’이라고 이름 지었다.

 18세기 중엽 광양현감 허담(허심)이 김여익을 추모하고 김 양식 보급에 대한 업적을 기린 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나, 비석은 없고 비문만 전해진다. 김해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태인동 궁기마을에 있는 그의 묘역과 사당을 전남도 기념물113호(1987.6.1)로 지정했다. 1999년에 김의 시식((始殖) 전시관과 유래비를 세웠다. 태인도는 임진왜란 때 무인도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 때 한양에서 살던 김씨가 피난 와서 살았다. 김씨는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 참전한 병사였다. 김여익은 바로 그분의 아들이었다. 이 비문에 김여익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수사(水使) 김여준(金汝浚)을 따라 청주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됐다는 말을 듣고 인조 18년(1640)에 장흥을 거쳐 전남 광양의 태인도에 들어가 해의(海衣)를 시식(始殖)하며 살았다 한다.

 김은 ‘해의(海衣)’, ‘자채(紫菜)’, ‘파래’라고 부른다. 반면에 ‘해태(海苔)’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식 표기이다. 이 김을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注)’에는 자채(紫菜), ‘장포현지’에는 색채(索菜),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자연’, ‘본초종신(本草從新)’에는 자영(紫英), ‘장주부지’에는 자채(子菜), ‘중약대사전(中藥大辭典)’에는 감자채(甘紫菜),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감태(甘苔) 또는 청태(靑苔)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도 해태(海苔), 건태(乾苔), 건해태, 바닷말, 참김, 단김 등이란 기록이 있다.

 김을 먹은 시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신라 때부터 먹은 것으로 복쌈(복리:福裏)이라 했다. 경남감사 하연의 ‘경상도지리지’에는 하동에서 김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429년 ‘세종실록’에서 명에 보내는 진상품에 해의(김)의 기록이 있고, 1456년 ‘조선실록’에도 해의(김)가 무역품으로 기록돼 있다. 또 1486년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남 광양 태인도에서 토산물로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정조 때 정약전이 남긴 ‘현산어보’에도 기록돼 있다.

 일본은 겐로쿠 시대(1688~1703)에 김 양식을 시작했다. 1840년대 대나무 발을 엮어 한쪽은 바닥에 고정시키고 한쪽은 물에 뜨도록 한 ‘떼밭’ 양식을 개발했고, 1920년대에 ‘떼발’을 ‘뜬발’ 로 개량해 김을 일정기간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절했다. 김은 약 80여 종이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10여 종이 있다. 지난 3일에 광양제철소를 방문하니 안내자가 지역 내에 한 지점을 지적하며, 저곳이 태인도(太仁島)이며 먹는 ‘김’을 시식하던 곳이라 했다. 이로 보니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 권력이 얼마나 무상했기에 왕명이 하달된 ‘김’의 유적지도 없앴는지 가슴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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