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06:23 (토)
고객 만족의 그늘
고객 만족의 그늘
  • 김혜란
  • 승인 2015.10.14 2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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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 소통과 힐링센터 소장ㆍTBN 창원교통방송 진행자
 어릴 적 설날 풍경이 떠오른다. 설날이어서 새 옷 입고 평소에 먹지 않던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설날이 다른 명절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집안 어르신과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세배를 해서 용돈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설날 거울 앞에서 웃음을 연습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에게 예쁘게만 보이려는 기본욕구와는 좀 달랐다. 사춘기가 되면서 감정이 요동쳤고 내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기 싫어졌다. 그래도 설날만큼은 용돈을 생각하며 이전처럼 웃었다. “니 반에서 몇 등하노?”, “학교는 어데 갈끼고?”, “형편 애리븐데 고마 취직하지?” 자꾸 성적이나 지원대학을 비롯해 내 미래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어른들 대하기가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견뎠다. 그런 잔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얼마간 버티고 나면 내 손에 들어올 쏠쏠한 지폐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첫 고객은 명절에 만나는 어르신들이었다. 죄송하다. 그래도 귀여운 태도와 앙증맞은 세배에 늘 용돈을 내밀던 집안 어르신들이 내게 고객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준 것 같다. 내 감정 상태로는 절대 웃고 싶지 않았던 대화 속에서도 미소 짓고 다소곳이 듣기 싫은 이야기들도 듣는 법을 배웠다. 감정노동 역시 경험했던 것 같다. 물론, 명절이나 손님 오실 때 외에는 내 감정을 속이고 미소 짓거나, 듣기 싫은 이야기는 10분도 듣지 않는 사춘기를 보냈다.

 사람들은 얼마간의 감정노동을 하고 살아간다. 만나는 대상을 ‘고객’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확실히 시작된다. 만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인식하자면 그들에게 뭔가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인식부터 전제돼야 한다. 학원은 물론, 학교 교육도 ‘교육서비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십여 년 전, 사찰에 스님들을 대상으로 서비스 교육을 다녀온 선배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종교도 신도에게 서비스차원인 면이 있나 보다 했다. 언론 역시도 구독자나 시청취자인 고객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한다. 뭐랄까, 올바른 보도와 사명감도 필요하지만 앞서서 고객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지, 고객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민한 지 오래다.

 감정노동에 관한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넉 달 동안 국내 730개 주요 직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2만 5천550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의 강도를 조사한 결과, 전화로 물건을 팔거나 손님의 요구사항을 접수하는 전화통신판매원(텔레마케터)이 국내 직업 가운데 가장 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무 중 다른 사람과 얼마나 접촉하느냐, 업무 가운데 민원인에게 대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화를 내거나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빈도 등이 기준이었고, 그중 전화통신판매원이 1위로 나타났다. 끝없는 전화통화와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성희롱이나 욕설 같은 언어폭력에 손쉽게 노출되는 업종이다.

 호텔관리자와 네일아티스트가 나란히 4, 5위를 차지했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들이 대부분 서비스 직종이다. 산업구조 자체가 서비스업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고, 서비스 직종이 아니어도 서비스와 고객 개념을 들여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이 자리 잡았다.

 감정노동은 일종의 과도한 스트레스다. 감정노동 직업인은 일이 많을수록, 시키는 대로 일만 할 경우, 그래서 일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느낄수록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높게 나타난다. 감정노동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만 조직이 원하는 감정표현을 할수록, 고객에게 보여야 하는 감정표현과 스스로의 감정을 같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수록 직무 스트레스가 높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감정노동 해소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의 분량이 적당해야 하고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책임감도 주어져야 한다. 또한 고객으로 인한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이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감정조절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들은 고용한 기업이나 조직이 해결해야 할 몫이 크다.

 자기계발을 지원(?)하거나 기업 교육 형태로 ‘감정조절’을 노동자 스스로 하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셀프리더십이나 일종의 심리요법, 혹은 힐링의 형태로 감정노동의 스트레스를 풀어보거나 억누르거나 감춰보려고 하지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고객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하는데 정작 본인에게는 진정성을 놓치면서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 기업과 조직이 ‘고객 만족’에만 심혈을 기울일 시대 역시 가고 있는 것 같다.

 고객이 왕이라고 한다. 크게 보면 고객만 왕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자가 다른 곳에 가면 고객이 돼 왕이 되기 때문이다. 서로의 아픔을 알고 있으니 배려하는 왕들로 영원히 함께 왕좌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아가 고객이 아니라 사람이 왕인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 ‘고객 만족’의 그늘에서 이제 그만 양지로 나오고 싶은 ‘고객 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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