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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운명, 배호와 장충단
기막힌 운명, 배호와 장충단
  • 송종복
  • 승인 2015.06.08 2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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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 (사)경남향토사연구회ㆍ회장
 배호(1942.4.24-1971.11.7)가 1967년 3월에 부른 그 유명한 ‘안개 낀 장충단공원’ 노래이며, 본명은 배만금(裵晩今)이며, 어렸을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배신웅(裵信雄)이다. 그는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광복군 제 3지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배국민과 어머니 김금순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복 후 조국에 돌아와 서울 창신동에서 살았다. 13세 때 아버지가 죽자 부산의 이모가 운영하는 모자원에서 생활하다가 중학 2학년 1학기에 중퇴했다. 그 후 혼자 상경해 KBS와 TBC 악단장을 지낸 외삼촌 김광빈에게 드럼을 배웠다. 1963년에 ‘굿바이’를 발표해 가수로 데뷔하고는 일약 스타로 급부상했다. 1967년 25세부터 가요계를 주름잡았고, 29세에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노래가사에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있는데 /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공원’이 있다.

 이 노래는 신장염 투병 중이던 27세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며, 장충동 녹음실에서 힘겹게 녹음을 했다. 한 소절 부르고는 의자에 주저앉고, 또 다시 일어나 한 소절 부르고는 또 주저앉고, 그리해 한 시간여 만에 겨우 녹음을 마치고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녹음실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이 바로 장충단과 기막힌 인연을 가진 배호였다.

 ‘장충단’은 1900년 9월, 고종황제가 남소영 자리에 건립한 제단이다. 이유는 을미왜변(1895) 때 순직한 시위대장 홍계훈, 궁내부대신 이경직 및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때 죽은 문신들도 추가로 해 제향을 지냈다. 그 후 항일투사들도 장충단에 모시어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 지낼 때마다 군악연주와 조총을 쏘았으니, 백성들의 경모심이 고무됐다. 그런데 일제는 1910년 8월에 주권을 빼앗고는 이 장충단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이곳에 벚꽃을 심어 다시 ‘장충단공원’을 조성하고는, 상해사변 때 전사한 일본인 동상과 이등박문(이또오히로부미)의 신전을 건립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우리는 광복이 되자 이들 동상과 신전(박문사)을 박살내었다. 남은 건물은 6ㆍ25전쟁 때 파손되고, 비(碑)는 1969년도 지금의 수표교 서편으로 옮겼다. 이 ‘장충단 비’의 정면은 순종이 쓴 글씨이며, 뒷면은 민영환이 지었다. 이 비는 ‘장(奬:장렬하다), 충(忠:충성하다)’의 뜻으로써 망국을 지켜보게 된 마지막 임금과 대신의 온 정성이 깃들어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내에 많은 시설물이 들어섰다. 원래 장충단은 지금의 신라호텔내의 영빈관 자리였고, 그 남쪽은 타워호텔에 이르고 있다. 그뿐인가 장충단공원은 남산공원에 흡수돼 그 명칭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원래 장춘단(?忠壇)이란 을미왜변 때 순절한 선조를 기리고자 광무 4년에 만들었던 ‘단’이요 ‘사당’이다. 이는 조국의 역사가 만든 사단(祠壇)이다.

 장충단에 모셨던 장렬한 충신들의 안식처인 장충단 사당을 새로 지어 떠도는 고혼(孤魂)들이 고이 잠들게 해 주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절 가난했던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공돌이와 공순이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고생하며 지냈던 그 시절의 애환을 배호의 노래를 통해 풀었던 것이다. 요즘 취업이 안 돼 마음고생 하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이라도 위로가 되는 제 2의 배호가 나와 희망과 꿈의 심금을 울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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