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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슈퍼 히어로
  • 김혜란
  • 승인 2015.05.06 2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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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공명ㆍ소통과 힐링센터 소장
 흑백 tv 앞에서 흥분하던 아버지와 삼촌이 떠오른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대결이었던 것 같다. 한국 복싱史상 최초였다는 두 체급 석권의 홍수환 선수의 승리장면은 워낙 많이 봐서 생생하게 기억한다. 홍수환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있었던 아놀드 테일러와의 경기에서 세계챔피언으로 등극하고 어머니와의 통화장면에서 이렇게 외쳤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때 홍수환 선수의 어머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대한국민 만세다” 대한민국 70년대 프로스포츠계는 권투의 시대였다. 그 이후 몇 번인가 대한민국 전체가 권투에 들썩였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희미하다.

 내 기억 속 최고의 권투선수는 무하마드 알리다. 원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였지만 70년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이미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백인전용 레스토랑에 들어가려다 쫓겨나는 순간, 자신이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고 오하이오 강물에 금메달을 던져버렸다. 백인의 성을 버리고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권투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라는 미국정부의 징집명령을 거부했다. 이유는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검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해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하고 한동안 링에 오를 수도 없었지만 흑인 인권운동에 기름을 부었고 세상은 새로운 영웅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싱겁게 끝나 버린 세기의 권투경기가 있었다. 미국의 메이웨더와 필리핀의 파퀴아오의 경기였다. 대전료만 해도 어마어마한 두 선수의 대결은 전 세계인을 TV 앞에서 붙잡아놓았다. 비록 어이없게 끝났지만 이 경기에서 필리핀의 파퀴아오 선수를 재발견하게 됐다.

 사실 메이웨더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놀라운 선수다. 그렇지만 복싱사상 최초의 8체급 석권 선수이자, 11체급을 거친 파퀴아오는 진적은 있지만 다시 싸워서 이겼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또한 말이 8체급이지, 20㎏을 찌우면서 스피드나 힘이 줄기는커녕 늘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파퀴아오 선수가 더 위대해 보인다. 권투라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한계를 넘어선 인간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국민이 중계를 시청하는 건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싸움을 중단하고 노사분규, 심지어 내전도 휴전을 한다.

 2013년 파퀴아오는 탈세 혐의로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복싱 수입을 조작해서 세금을 적게 낸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파퀴아오를 비난했지만, 파퀴아오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적은 대전료밖에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며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팬들도 다수 생겼다고 한다.

 파퀴아오는 어릴 때 찢어지게 가난해서 길거리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권투를 시작한 후에도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했다. 생계 때문에 시작한 권투도 처음에는 대전료가 1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성장 과정 탓인지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빈민촌에 의약품도 지원하고 권투 지망생들에게 장학금을 줬고 미국에서 성공한 후에도 필리핀에 살면서 자선사업에 앞장섰다.

 파퀴아오는 현재 필리핀 정치인이기도 하다. 알몸으로 치고받고 번 돈을 필리핀 사회를 위해 내놓는 그는 여느 성공한 정치가나 기업가와는 다르다. 세계적으로 성공하고 자기계발분야에서 전설이 된 기업가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권과 협상(?)한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알리나 파퀴아오 선수는 또 다른 용기를 보여준다.

 대한민국도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를 꽤 배출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내놓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지 못했다. 본인의 땀으로 돈을 벌지만 그만큼 국민의 순수한 사랑을 받는 스포츠 선수들이다. 지금의 자리가 있기까지 자신의 땀만 생각할 뿐, 숱한 팬들의 사랑을 돌아보지 못하는 스타들은 그저 별로 빛나다가 스러져 간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용기가 있는 스타들은 이 시대 슈퍼 히어로가 된다. 무하마드 알리나 매니 파퀴아오가 보여준 용기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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