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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슭 공비토벌 한민족 삶의 현장
지리산 기슭 공비토벌 한민족 삶의 현장
  • 이명석 기자
  • 승인 2015.03.01 2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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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지리산 역사관’
▲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있는 지리산 역사관에는 50년대 이전 화전민들의 생활용품인 베짜기 베틀 등이 전시돼 있다.
화전민 생활용품 전시 역사의 산 교육장 바람 국가발전ㆍ평화통일 기원

 하동군이 6ㆍ25전쟁을 전후한 지리산의 격전지 루트를 관광 자원화하고 국가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키 위해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 개관한 지리산 역사관이 활용도가 높아 후세들에 안보의식 고취에 기여하고 있다.

 이 지리산 역사관은 대지 500여 평에 건평 45평 정도로 건립됐다. 역사관 내에는 50년대 이전 화전민들의 생활용품 40여 종, 관련 자료 판넬 10개, 빨치산 관련자료 전시판넬 4개 디오라마(전투장면 모형)군 홍보자료 및 특산품 관광유적기 전시판넬 8종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 대성골은 지리산 남부 능선아해 깊은 계곡과 울창한 산림이 뒤덮여 있고, 한국전쟁 시 빨치산 격전지로써 남부군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아지트이자 사살 장이다. 백선엽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쫓겨 대성골로 모이면서 수많은 빨치산들이 불벼락을 맞고 죽어간 곳으로 빨치산들의 한이 맺힌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인 곳이며 독립운동가들이 지리산에 숨어 살기도 했는가 하면 농민 노동운동인 동학운동이 혁명적으로 벌어지기도 한 곳으로 식민지 치하에서는 억압인고 고통받는 자들의 안식처를 제공해 준 명산 지리산은 애국자들의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 한민족 삶의 현장이다.

▲ 지리산 역사관 전경.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는 산청군 함양군과 더불어 하동군은 처절한 역사의 한 현장을 찾아 지나온 과거 속에 새로운 안보 교육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역사관 겸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과 등산객들의 안내에도 한몫해 오고 있다.

 또한 남북정상 회담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철도 복원은 물론 금강산 관광 등 민족화합과 통일의 기운이 감도는 통일의 21세기를 맞은 현시점에서는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의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평화통일의 상징으로 지리산 빨치산 역사관이 자리매김 하고 있다.

 잊혀진 시대지만 쫓고 촉기는 군인 경찰 지역 향토방위대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대성골을 잊지 말고 희생 당한 애국자들의 혼을 길이 기리고 후세대에 비참한 전생은 없어야 한래는 50대 이하 후손들에 안보교육장으로 한몫하게 됐다.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작전은 지리산 기슭 성공적인 작전으로 60세 이상 성인이라면 산증인으로 잊을 수가 없는 악몽의 지리산 이북에서 내려온 남부군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사살과 여성 총책 정순덕 생포의 전승지다.

 이북 남부군 빨치산 총수 이현상은 1905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중아고등 보통학교 재학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가했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 공산청년회 산하 학생부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반일 동맹휴학을 주도한 바 있고 일제의 대규모 공산당 검거 때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치고 출옥 후 박현영 감상용 등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고 일제 말기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가 8ㆍ15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공산당이 남조선 노동당에 개편된 뒤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남한에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했다.

▲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있는 지리산 역사관에는 50년대 이전 화전민들의 생활용품인 베짜기 베틀 등이 전시돼 있다.
 1948년 북조선 노동당의 경정에 따라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 지리산으로 들어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투쟁을 일삼아 오다가 1951년 북한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조직적인 남부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각 도당 유격대를 남부군사령부에 소속 시키는 등 조직적인 투쟁을 해오다가 1953년 9월 18일 그는 지리산 빗점골 합수 내 너달강 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살됐다.

 당시 나이는 48세였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크게 보면 군 토벌대와 경찰토벌대에 의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빠리산에 의해 사살 등 세 가지 설이 현재까지 나돌고 있으나 그를 사살한 공적을 두고 남한에서는 법정 다툼까지 벌어지기도 했는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한에서는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이현상의 생애와 투쟁 죽음은 아직 안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이현상 그가 남긴 수많은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는 가장 고독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럼 버림 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 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 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냉혹한 시대를 살다간 투철한 공산주의 혁명가였고 전쟁에 있어 용맹하고 시대를 살아간 공산주의 혁명가였고 전쟁에 있어 용맹한 빨치산의 대장이였다. 그런 그가 시대가 준 것은 끝없는 시련이었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뿐 이었다. 그는 엄혹한 시대를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밀고 간 공산주의 세계에서 영웅으로 었고 있고 동료와 부하들의 아픔을 함께한 공산주의 세계에서 인정받은 이름 높은 이현상은 지리산 험준한 능선에서 고독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은 지리산 속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지리산인 것이다.

 앞으로 이 역사관은 단순한 빨치산의 역사관만이 아니라 지리산을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보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길 바라며 특히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상봉 경의선 철도 복원은 물론 금강산 관광 등 민족화합과 통일의 기운이 감도는 통일의 21세기를 맞은 현시점에서는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의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평화통일의 상징으로 지리산 빨치산 역사관이 자리매김 되기를 기대하며 잊혀진 시대지만 쫓고 쫓기는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오늘 이 지리산에서 산행을 즐기고 있는 푸른 지리산 그렇지만 민족의 슬픔과 애환을 안고 있는 지리산의 참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며 진정한 통일의 길을 염원해보는 값진 진정한 산행의 의미를 다져보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지리산을 즐겨 찾는 등산동호인들 모두가 지리산 상봉에서 힘찬 함성으로 국가발전과 평화통일을 기원해 주기 바란다.

 지난 2007년 6월 3일 지리산 역사관 개관식에는 하동군 주최 (사)대한산악연맹하동산악회 주관 지리산 역사관 개관 기념식 및 지리산 격전지 답사 산행에는 군내 기관 단체장 산악인클럽 주민 등 800여 명이 참가 개관식에 이어 역사관~삼정~빗점~백소령~덕평봉~역사 간 20㎞를 산행으로 한국전쟁의 역사를 상기하고 심신을 단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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