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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여 가구 600년 세월 품고 ‘살붙이’로
110여 가구 600년 세월 품고 ‘살붙이’로
  • 정철윤 기자
  • 승인 2015.01.15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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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집성촌 가다,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은진 임씨마을
▲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은진 임씨마을 집성촌이다. 이곳에는 고택, 갈천서당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고택ㆍ갈천서당 등 유적 많이 남아 평택 임씨서 시진군 봉해 분관 성씨
임천년 임금 바뀐 뒤 산수 취해 택거 윤덕봉은 갈천ㆍ도계ㆍ첨모당 봉우리
월성계곡 강선대ㆍ장군바위ㆍ사선대 갈천서당 임훈 선생 후학 양성 건립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는 은진(현 논산시) 임씨의 집성촌이다.

 거창읍에서 서북쪽 1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과 경계를 이루며 덕유산에 둘러싸여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갈계 마을은 현재 153가구에 65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40여 가구의 다른 성을 제외하면 모두가 은진 임씨들로서 동족마을이 표본이 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 때는 마리현에, 신라 경덕왕때는 이안현에 속하는 등 많은 지명을 가졌지만 영조 43(1767)년 안의현에 속하다가 거창에 소속된 것은 백년 미만이다.

 은진 임씨는 평택 임씨에서 분관한 성씨이며, 득관시조(관향을 처음 얻게된 시조)는 임자미로 고려 숙종조 예조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본래 평택 임씨였으나 시진군(시진은 현재의 은진)에 봉해져 이를 본관으로 삼게 됐다고 한다.

 갈계의 은진 임씨는 세종 임금이 승하하시고 문종이 등극한 1451년 의령현감으로 있던 은진을 본으로 하는 임천년이 임금이 바뀐 뒤 산수에 취해 이곳에 택거함으로써 시작됐다.

 그 당시 갈천촌은 칡넝쿨이 무성했고 산천 또한 수려했으며, 수석이 유명하고 마을 앞의 산에는 상어와 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어, 자손만대로 계승할 곳이라 생각해 이 고장을 거처로 삼았다.

▲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경남유형문화재 제295호. 갈천 임훈이 아우 첨모당 임운과 함께 건립해 후학을 교육하던 곳이다.
 석천 임득번은 임천명의 손자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했는데 그는 고려시때부터 내려오던 몽고픙의 폐습을 개선하고 도학을 강론해 문맹한 백성을 선도했다.

 갈천 임훈 선생은 임득번의 아들로 중종 35년에 등과했으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귀향해 1561년 부친상을 당했으나 60이 넘은 노령에도 삼녀시묘를 지성껏 해 1564년 정려가 내려졌다.

 갈계리 정려각은 조선 명종때 안음 현감 박응순이 임훈, 임운 형제의 효행을 널리 알려 생전에 내려진 생 정려 2위와 순조 임진년(1832)에 정려된 임한신과 한신의 처 고령 박씨, 고종 28년 신묘년(1891)에 정려된 임경원, 광무 9년(1905)에 정려된 임지예를 추가해 모두 6위의 정려를 모시는 정려각이다. 현존 건물은 1905-1910년경에 지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살아생전에 받는 생 정려를 받은 분은 6명인데 그 중 2명이 은진 임씨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명종 당시 전국의 육헌으로 천거된 후 1566년 언양현감으로 임명됐었고, 선조 2(1569)년에 구자감주로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고 비안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치국의 도를 설파했으며, 특히 퇴계 이황과 같은 현사를 중용하도록 상주했다.

 갈천 선생은 퇴계 선생의 인품과 학문을 흠모해 서신으로 교류했으며, 그의 동생 예를 이황에게 보내 수학하게 했다.

 중종 38(1543)년 퇴계 선생은 선생의 장인인 권질과 처외숙인 전철을 찾아 마리면 영승까지 와서 갈천 선생을 만나려 했으나 갑작스런 왕명에 의해 돌아가는데, 이때 영송을 영승으로 수송을 수승으로 명칭을 바꾸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퇴계 선생이 영승을 방문했을 때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에 영송(옛 백제의 사신을 맞이 했던 곳이라는 뜻에서)이라 했지만 사신이 갔다가 돌아 올수도 있고, 영원히 못 돌아 올수도 있다는 영송은 뜻이 좋지 않아 영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생 도계공 영은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으나 단명했다.

 갈천 선생의 막내 동생 첨모당 예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서 도산 퇴계문에서 수학해 대제학의 벼슬을 지내고 가선대부로서 사후 용문서원에 봉행하고 있다.

 마을 서쪽의 윤덕봉은 봉우리가 셋인데 이것을 갈천 선생의 삼형제인 갈천, 도계, 첨모당의 봉우리라 불린다.

 갈계마을은 칡이 내처럼 많고 바다처럼 넓게 퍼져 있다고 해 칡내라고 불리다가 그 후 치내라 부르게 되었는데 갈천 선생의 호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 갈계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34호인 정려각.
 갈계리가 있는 북상면에는 옛날부터 자연경관이 수려해 1경인 용암정부터 13경인 수리덤까지 북상13경이라 불린다.

 북상면 월성계곡은 차디찬 물줄기가 남덕유산 물줄기를 따라 5.5㎞ 이어져 있다.

 월성계곡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갈계숲부터 황점까지 자동차나 자전거를 이용하면 북상면 13경인 강선대, 장군바위, 사선대 등 이 이곳에 늘어서 있다.

 그 중 사선대는 최고의 명소이다.

 또, 조선 말 우국지사를 모아 의병훈련장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일본 관현에 탐지돼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곳으로 유명하다.

 갈계리에는 1573년에 건립한 갈천서당이 있는데 조선조 명종 때 육현신의 한사람으로 광주목사를 지낸 효간공 갈천 임훈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다.

 갈천서당은 목조 와가 건물로 1993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됐고 건물은 강당과 대문으로 구성돼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로 된 맞배지붕 양측에 풍판(風板)을 달았으며, 처마 밑에는 그 당시 사용하던 큰북의 외통이 걸려 있고 뜰에는 후손들이 세운 임훈과 임운 두 형제의 신도비(神道碑)가 나란히 있다.

 갈계리에 거주하는 대종손인 임영익(57) 씨는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고는 있지만 600년 전 할아버지가 산자수려한 이곳 북상에 들어오셔서 충효를 으뜸으로 가르치고, 전통을 가르치고 지금까지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 정신만은 지키며 살아갈 것” 이며 “군대 3년 빼고는 줄 곧 고향을 지키면서 살아왔고, 개인주의가 판치는 요즘 시대에 앞으로 우리 자손들이 은진 임씨의 정신을 잘 이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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