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츠 탱고- 1
렛츠 탱고- 1
  • 이주혜 작가
  • 승인 2014.12.01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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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다. 탱고슈즈를 신자.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옆 침대 베르베르의 잠꼬대로 시작했다. 동트기 한참 전에 눈을 뜨고 있던 곽은 자명종 소리에 이제야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곽의 탱고슈즈는 같은 방 하숙생들의 것과 함께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긴 채 벽에 걸려 있었다. 꽃다발처럼.

 오늘은 검정색과 흰색 송아지가죽이 하트모양을 그리며 붙어 있는, 끝이 적당히 뾰족한 유선형 슈즈를 골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를 타기 전 이태원의 댄스화 전문점을 찾아가 신중하게 고른 구두였다. 아래층 부엌은 벌써 알싸한 이국의 향신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안느는 부엌데기 주제에 손맛보다 탱고의 맛이 훨씬 강한 여자였다. 곽은 잠옷 겸 내복 위에 그대로 셔츠를 걸쳤다. 하늘하늘한 인견으로 만든 셔츠는 붉은 포도주 빛. 선연하면서 동시에 깊은맛이 있는 그 빛깔은 곽의 은발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곽은 일찍부터 이 빛깔을 사랑했다.

 오, 버건디. 탱고처럼 뜨거운 색이군.

 곽 다음으로 일어난 크로스가 눈곱을 떼어내며 주절거렸다. 크로스의 입에서 삭은 보리냄새가 풍겼다. 간밤 크로스와 베르베르는 늦도록 맥주병을 부딪쳤다. 곽은 일찌감치 손사래를 치며 침대로 기어들어갔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대머리 배불뚝이와 네덜란드 출신의 깜둥이가 밤새 자신의 험담을 늘어놓았음을 알고 있다. 까다로운 노인을 싫어하는 건 한국이나 세계나 똑같았다.

 오늘 연습할 스텝은 오쵸. 한쪽 발을 다른 발 앞뒤로 가로지르며 십자모양을 만드는 끄루세 스텝을 반복하며 지그재그로 발을 옮겨 바닥에 8자를 그리는 동작이었다. 앞으로 가는 앞 오쵸와 뒤로 가는 뒤 오쵸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연습할 생각이었다.

 곽의 연습 장소는 부엌 옆의 아름드리 망고나무 아래. 바닥을 뒹구는 망고열매를 툭툭 차내며 끄루세와 오쵸를 반복하다 보면 겨드랑이에서 달큰하게 썩어가는 망고냄새가 풍겼다. 일진이 별 볼일 없으면 드럼통 같은 안느의 허리를 붙들게 될 것이고 간밤의 꿈이 길몽이었다면 하숙집 여주인 마리에따를 품어볼 수 있을 것이다.

 간밤에 꿈에서 유메이를 보았다. 키가 작은 유메이는 머루 알처럼 까만 눈으로 곽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댄스해요.

 유메이가 전족 같은 그 조그만 발로 달싹 곽의 발등에 올라탔다. 곽은 품에 쏙 안기는 유메이를 태우고 오쵸를 반복했다. 꿈속의 곽은 카투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스물한 살 젊은이였기에 다다미 깐 방에서 수십 번 8자를 그려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유메이가 가벼운 여자여서였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꿈이란 것의 뻔뻔함 때문일지도. 반도네온 반주에 맞춰 밤새 8자를 그리는데 유메이가 까르르 웃으며 몸을 뒤로 확 젖혔다. 깃털 같던 여자가 묵직한 추처럼 곽의 팔을 잡아뺐다.

 아파. 하지 마.

 유메이는 일곱 살 계집애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기만 했다. 귀여웠던 여자가 끔찍해졌다. 곽은 그만 두 손을 놓아버렸다. 유메이는 밀치는 힘까지 보태어 야무지게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까르르. 까르르. 누런 다다미 위로 검붉은 모란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어슴푸레한 방안에서 눈을 떴을 때 망고나무 그림자가 창을 넘어와 곽의 가슴팍을 덮고 있었다. 아직도 유메이가 묵직하게 품을 파고드는 것만 같아 팔을 내저었지만, 그림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도 늘어난 곽은 미련하도록 팔을 내저으며 그림자와 씨름했다. 유메이도 그림자도 일찌감치 새벽잠을 물려버린 노인의 누운 몸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꿈에 유메이를 본 것이 길몽일 수도 있겠구나 했던 것은 안느의 호출을 받고 부엌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갓 구운 크루아상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자 오븐에서 막 빠져나온 빵 냄새를 처음으로 경험했던 카투사 시절이 떠올랐으며, 그때가 곽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안온했던 호시절이었다는 뒤늦은 자각이 메마른 노인의 마음을 뭉클하게 적셨다. 부풀어오른 밀빵 속처럼 따스했던 여자 유메이는 그 시절의 마스코트랄까, 혹은 훗날을 기약하며 묻어둔 타임캡슐이랄까. 결국 간밤의 꿈은 아름다운 추억을 그어준 마지막 성냥개비 같은 것이리니, 암, 길몽이고말고, 결론지으며 따뜻한 크루아상을 한입 쭉 찢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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