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11.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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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262)
 그날 새벽 혁명을 주도하던 해병들이 한강대교에 나타났다. 한강대교에서 서울을 지키는 헌병들은 예기치 않은 부대를 막아선다. 그러자 해병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헌병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퍼붓고 그대로 서울로 진군해 정부 주요 기관과 방송국을 장악했다.

 박정희 장군의 정변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됐다. 원래는 1960년 5월 8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지만, 예기찮게 4ㆍ19혁명이 발생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잠시 중단됐다가 제2공화국도 무능하고 사회질서가 엉망이자 다시 계획을 세우고 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 정보를 몇 번씩이나 접하고도 한국에 미군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봤다. 그러다 막상 쿠데타가 발생하자 피신해 버린다. 해병이 서울을 점령하자 인근의 부대들은 애초부터 동조하는 부대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부대는 혁명군이 미리 포섭한 부관이나 다른 장병들이 부대 책임자를 협박해 동조하게 한다.

 그러나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군 최고의 화력인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은 혁명군에 동조하지 않았다. 도리어 야전군을 서울로 돌려 쿠데타 진압 계획을 세웠지만, 차마 국경선을 포기하고 서울로 군사를 이동치는 못했다.

 그리고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 명령서를 들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았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진압 명령서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다. 그때 윤보선 대통령은 만약 서류에 사인을 한다면 한국군은 아군들끼리 서울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로 인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을 알고 끝까지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

 또 이북에서는 군사 혁명의 정보를 접하고 미 제국주의를 동조하는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환영의 성명을 준비했지만 쿠데타군의 혁명 공약 등을 종합해 본 후 ‘극심한 반동에 의한 정변이며 정변 세력들은 친미 군인들이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5월 19일에는 정변군들이 장관, 시장과 도지사를 비롯한 정부 주요 기관의 책임자를 모두 군인으로 대체하고, 군인들이 중심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가 기관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선언한다.

 혁명의 시간이 지날수록 삼천포에서도 그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싸움하는 횟수가 줄었다. 전에는 두 사람이 싸우면 한 사람이 많이 맞아 병원에 입원해도 별다른 문책이 없었다. 그런데 새 정부는 때리고 맞는 것에 엄하게 대처해 나간 것이다. 남을 조금만 때려도 배상이나 구속이 집행되고, 싸운 두 사람 모두 쌍방 과실로 책임을 물었다.

 그래서 서로 시비가 일어나 한 사람이 주먹을 들면 다른 한 사람은 “때려봐라. 돈 벌어 놨으면 어디 때려봐라”하면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정갑주 의원의 비서로 활약하면서 삼천포 상이군인 분회장인 싸움꾼 인주 삼촌도 낙선에다, 정부가 싸움하는 것을 엄히 다스리게 되자 삼천포에서 사는게 재미가 없는지 목포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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